갈리아 전쟁
[전조]
당시 갈리아는 갈리아 내부의 수많은 민족들이 서로 연합하여 갈리아의 패권을 다투고 있던 불안정한 상황이었습니다. 특히 하이두이족과 세콰니족이 가장 강력하였는데 세콰니족은 당시 명성이 높았던 게르만족과 연합하였습니다. 이에 호응한 게르만족의 일파인 수에비족의 수장 아리오비스투스는 자신의 부하들을 이끌고 라인강을 건너와 수차례에 걸쳐 갈리아 연합군을 격파하였고 그 결과 세콰니족은 갈리아의 패권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리오비스투스는 세콰니족의 공물에 만족하지 않고 세콰니족의 영토에 눌러앉았으며 이곳의 3분의 1을 요구를 하였는데 이는 게르만족들이 새로 갈리아로 이주할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세콰니족 조차 게르만족을 끌어들이는 것에 대해 깊이 후회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끊임없이 게르만족의 침략에 시달리던 헬베티족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의 영토는 알프스 산맥과 론 강, 그리고 로마 속주와 레만누스 호수로 둘러싸였기 때문에 영토를 확장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이때 헬베티족의 가장 강력한 귀족이었던 오르게토릭스는 갈리아 내로 이주해 새로 정착하자는 제안을 하였고 이것이 헬베티인들의 호응을 받습니다.
오르게토릭스는 헬베티족의 지휘를 위임받고 외교를 통해 주변 부족의 협조를 얻어내고자 하였는데 놀랍게도 갈리아를 양분해서 서로 대립했던 하이두이족과 세콰니족 양쪽 모두에게 접근한 오르게토릭스는 하이두이족에서 가장 인망이 높았던 둠노릭스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 인척관계를 맺었고 세콰니족의 유명한 실력자의 아들인 카스티쿠스에게 접근하여 그의 협조의 약속을 받아냅니다.
이들의 야합은 셋 모두 매우 유명한 정치가임과 동시에 기득권에 도전하는 입장이라는 점에서 수도 로마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1차 삼두정치를 연상시키는 야합이었습니다. 오르게토릭스는 최강의 귀족이었으나 권력을 손에 넣지는 못하였고, 둠노릭스는 자신의 형이 가지고 있는 부족장의 권위에 도전하는 입장이었으며 카스티쿠스는 자신의 아버지가 족장에서 물러난 뒤 호시탐탐 부족장의 지위를 노리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들은 서로 야합함으로써 각각 서로의 도움으로 부족장의 지위에 오른 뒤 갈리아 전역을 서로 삼분하여 통치하자는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야합은 곧바로 들통났고 헬베티족의 오르게토릭스가 가장 먼저 실각하게 됩니다. 오르게토릭스는 그의 돈을 사용하여 재판의 배심원들을 자기 사람으로 채워 죄를 면하였는데 이에 격분한 헬베티족이 무력을 사용해 오르게토릭스를 응징하기 위해 병력을 편성하자 오르게토릭스는 자결하고 맙니다.
오르게토릭스가 자결했음에도 헬베티인들은 그가 처음 제안한 갈리아 침략에 대해서는 호평하였으므로 갈리아로의 이주 계획을 계속 추진합니다. 이들이 침략 준비를 마쳤을 땐 12개 도시와 400개의 마을이 모두 불태워졌고 30만이 넘는 대규모의 전력을 갖춘 헬베티족은 3개월치 식량을 휴대하여 갈리아로 이주하기 시작합니다.
[카이사르 갈리아 총독 임명]
갈리아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때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 총독직을 열망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왜 하필 갈리아 총독을 원하였던 것인가는 그가 저 위에 나온 갈리아의 정세를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고 따라서 전쟁의 가능성을 내다보았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에서는 그가 갈리아로 부임하자마자 우연히 저 헬베티족의 침략을 맞닥뜨린 것처럼 서술하나 그가 갈리아 총독으로 부임하는 과정과 헬베티족에 맞서는 전력을 편성하는 과정을 본다면 그가 헬베티족의 움직임을 사전에 파악하였고 집정관 시절에 준비에 들어갔었던 것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먼저 카이사르가 임명된 갈리아 총독은 단순한 총독직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로마의 통치하에 있는 갈리아 속주는 갈리아 키살피나와 갈리아 트란살피나로 나뉘어 통치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속주가 2개이므로 2명의 총독이 가서 통치하는 것이 옳았으나 카이사르는 이 두 개 속주에다가 일리리아 속주까지 세 속주를 한꺼번에 다스리는 총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5년이라는 상당히 긴 임기를 부여받았고 4개 군단의 지휘권, 그리고 부사령관 선출권과 식민지 건설의 권한까지 부여받았습니다. 이러한 기존의 총독직을 능가하는 권한을 카이사르가 가진 것은 그가 다른 총독들과는 전혀 다른 즉, 갈리아 전쟁을 치르기 위한 역할을 애초부터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라고 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헬베티족과 만나면서 보름 사이 속주에서 1개 군단을 뽑아냈고 그들과 협상하면서 추가로 2개 군단을 뽑아 보충하였다고 갈리아 전기에 기록해 두었는데 3개 군단이 새로 모집되고 합류하는 과정이 단 보름 만에 이루어지는 것은 지나치게 빠른 속도였습니다. 따라서 이는 카이사르가 이미 병력을 준비해두었고 전투가 벌어지자 이들을 소집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본다면 카이사르는 갈리아 총독으로 부임되기 전부터 갈리아에서 전쟁을 벌일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카이사르는 갈리아 총독직을 원하고 있었고 삼두정치의 일원인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협조를 얻어낸 카이사르는 원로원이 정한 기존의 산림과 가도의 직책을 갈리아 총독직으로 바꿉니다. 그리고 이것이 민회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통과되자 집정관 임기가 만료된 카이사르는 기원전 58년에 지체없이 갈리아 속주로 출발합니다.
당시 헬베티족은 자신의 영토를 모두 불사르고 갈리아로 침략하는 중이었고 따라서 카이사르는 속주에 주둔 중인 1개 군단과 함께 론 강을 사이에 두고 헬베티족과 조우하게 됩니다.
[갈리아 전쟁 1년 째 : 헬베티족과의 대치]
카이사르는 론강에 도착하자마자 다리를 파괴하여 헬베티족의 도강을 방해합니다. 헬베티족은 갈리아 침공이 목적이었고 당시 최강국이던 로마를 적으로 돌릴 의사가 없었습니다. 카이사르 휘하의 병력은 적었으나 헬베티족은 로마군을 공격하지 않고 카이사르에게 사절을 보내 로마 속주의 통과를 요청합니다. 하지만 적의 무리를 자국의 영토 안에 들이는 것은 아무리 헬베티족이 우호적으로 나온다 해도 들어줄 수 없는 요청이었습니다. 카이사르는 시간을 벌기 위해 보름 동안 생각할 시간을 달라하였고 그동안 강변을 따라 19마일에 걸친 16피트의 보루와 참호를 파고 성채를 곳곳에 둔 뒤 수비대를 배치하는 등의 진지 공사를 한다. 이러는 동안 카이사르가 속주에서 추가로 뽑은 보조병이 합류하였고 이로써 카이사르는 헬베티족과 맞설 만한 전력을 갖춥니다.
헬베티족이 약속한 시간에 찾아왔지만 카이사르는 명백히 거부하였고 로마 속주를 침입한다면 전쟁일 뿐이라고 엄포를 놓습니다.
그 뒤 헬베티족은 몇 번 뗏목으로 강을 건너는 움직임을 보이다 로마군의 방비가 철저함을 보고 도강을 포기합니다.
[갈리아 전쟁 1년 째 : 헬베티족의 이동]
로마 속주를 통해 갈리아 내부로 들어가는 것을 포기한 헬베티족은 과거 그들에게 호의적이었던 하이두이족의 둠노릭스에게 연락합니다. 둠노릭스의 중재로 세콰니족의 영토를 통과하는 허락을 받은 헬베티족은 세콰니족의 영토를 통과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들은 곧 폭도로 변해 주변 영지를 마구 약탈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세콰니족의 영토를 유린한 헬베티족은 그대로 세콰니족의 영토를 신속히 가로질러 하이두이족의 영토로 진입하려 하였습니다.
첩보를 통해 전황을 신속히 보고받고 있었던 카이사르는 이 사태에 대해 대단히 우려하였습니다. 그는 헬베티족이 하이두이족을 침입한 뒤 그대로 갈리아 중부로 진입해 산토니족의 영토를 침략해 점령한다면 로마 속주가 그대로 헬베티족의 위협에 노출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사전에 저지해야 한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직접 이탈리아로 돌아가 2개 군단을 새로 편성하고 숙영 중인 다른 갈리아 속주의 3개 군단을 합류시켜 5개 군단을 이끌고 오기로 하였고 그는 즉시 이탈리아로 가서 5개 군단과 함께 전장으로 돌아왔습니다. 5개 군단이 기존의 보조병을 비롯한 1개 군단과 합류하자 6개 군단을 거느리게 된 카이사르는 이 병력을 이끌고 갈리아에 개입할 시기만을 가늠하고 있었습니다.
[갈리아 전쟁 1년 째 : 헬베티족과 로마군의 싸움]
헬베티족은 드디어 하이두이족의 영토로 진입하였습니다. 세콰니족의 영토가 약탈당하는 것을 지켜본 하이두이족은 근처에 많은 수의 군단병을 거느리고 대기하고 있었던 카이사르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이를 기다리던 카이사르가 즉각 행동을 결의한 카이사르는 군을 이끌고 신속하게 기동하였습니다.
당시 헬베티족은 강을 건너는 중이었습니다. 이를 포착한 카이사르는 밤이 되길 기다렸다가 새벽 1시경 3개 군단을 이끌고 야습하여 마저 강을 건너지 못하고 4분의 1 정도 남아있던 헬베티족을 쳐부숩니다.
이로써 카이사르의 개입을 알게 된 헬베티족은 다음날 사절을 보내 카이사르에게 강화를 제의합니다. 카이사르는 강화의 조건으로 하이두이족과 세콰니족에게 보상을 하고 볼모를 제공할 것을 요구하나 이것이 굴욕적이라 판단한 헬베티족은 카이사르의 강화 조건을 거부합니다.
그 뒤 헬베티족은 다시 하이두이족의 영토를 지나가고 카이사르군은 이를 후미에서 쫓아갔습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동맹군에게 기병 4천을 제공받습니다.
그런데 이 기병이 헬베티족의 기병 500기와의 교전 중 몇개 부대가 퇴각하여 패배한 사건이 있었고 하이두이족의 군량 보급이 자주 끊기는 일이 있게 되자 카이사르는 격분하여 부족장을 소집해 질책하는데 이때 부족장들로부터 헬베티족에게 우호적인 둠노릭스가 손을 쓴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둠노릭스는 기병 지휘관으로 카이사르 휘하에 있었기 때문에 카이사르가 그를 처형하는 게 가능했지만 하이두이족의 수장이었던 디비키아쿠스가 하이두이의 친 둠노릭스 일파들에게 공격당할 것을 우려해 눈물로 호소하자 둠노릭스를 용서키로 합니다.
그 뒤 헬베티족의 추격을 계속하였는데 또다시 군량이 떨어지는 일이 발생하자 하이두이족의 도시로 군대의 방향을 돌렸습니다. 이를 로마군이 겁먹고 도망가는 것으로 판단된 헬베티족은 갑자기 전력을 다해 로마군에게 공격을 감행하였습니다.
이를 본 카이사르는 기병을 모두 내보내 헬베티족의 공격을 견디는 한편 신속하게 병력을 언덕 위로 배치하여 맞섰습니다. 로마군의 정예 4개 군단이 3열로 포진하였고 신병은 언덕 꼭대기에서 짐을 지키게 하였고 배치가 마친 뒤 기병은 철수하였습니다.
헬베티족은 기병을 쫓아 돌진하였고 곧 흩어진 기병의 배후에 포진한 로마 보병과 접전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로마 보병은 헬베티족에게 필룸을 던져 방패를 소모하게 한 뒤 일제히 돌진하였습니다. 로마군의 공세에 헬베티족은 용감하게 싸웠지만 1마일 정도 뒤로 밀리게 되었고 이를 본 헬베티족의 후방의 병력 일부가 우회해서 로마군의 우익을 협공했습니다. 이 움직임을 본 로마군 3열은 전열에서 빠져나와 헬베티족의 기동에 응전합니다.
이 싸움은 정오부터 밤이 되도록 계속되었고 헬베티족은 일부는 패주하고 일부는 저항하면서 점점 그들의 진영까지 밀리게 되었다. 하지만 마침내 진영을 빼앗기게 된 헬베티족은 군수물자를 상실하게 됩니다.
이로써 카이사르에게 저항을 할 수가 없게 된 헬베티족의 생존자들은 다음 날 사신을 보내 카이사르에게 항복했고 카이사르는 볼모를 받은 뒤 헬베티족에게 그들의 근거지로 돌아가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카이사르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헬베티족은 36만 명 중 11만 명만 살아남았다고 하였습니다.
[갈리아 전쟁 1년째 : 게르만족과의 전쟁]
헬베티족의 전사로서의 명성은 상당히 높았고 50년 전 로마군을 패배시키고 집정관을 전사시킬 정도로 로마를 상대로도 만만찮은 모습을 보였던 바 있었습니다. 게다가 헬베티족이 유린한 영토는 갈리아의 패권을 다투던 세콰니족과 하이두이족의 영토들이었습니다. 이러한 헬베티족을 한 번의 싸움으로 크게 무찌른 카이사르와 그의 군대의 명성은 매우 높아졌습니다.
갈리아의 족장들은 카이사르와 그의 군대로 하여금 갈리아를 침공하고 있었던 게르만족을 상대하려 하였습니다. 전 부족장이 몰래 카이사르와 만났고 하이두이족의 족장인 디비키아쿠스는 그들을 대표하여 게르만족에게 고통받는 갈리아인들의 상황을 설명하고 카이사르에게 이를 도와달라고 합니다.
이는 카이사르에게 있어서 좋은 제안이었는데 이러한 분쟁에 개입하여 적의 세력을 내쫓고 그 지역의 새로운 패권자가 되는 것은 전형적인 로마인들의 세력 확장 방법이었으므로 카이사르가 갈리아의 패권을 주장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즉시 대응키로 하였고 게르만족의 일파인 수에비족의 지도자 아리오비스투스에게 사절을 보내 더 이상 게르만족을 불러들이지 말 것, 갈리아의 볼모를 모두 돌려보낼 것, 그리고 갈리아족을 상대로 더 이상 전쟁을 시도하지 말 것이라는 이 세 가지를 요구합니다.
이는 아리오비스투스에겐 날벼락같은 제안이었고 따라서 그는 "승자와 강자가 패배자와 약자를 마음대로 다루는 것은 인류 역사의 오랜 법칙이고, 당신네 로마인들도 여태까지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느냐? 그래서 승자이자 강자인 나도 패배자이자 약자인 갈리아인들을 그렇게 다루겠다는데 당신들이 무슨 권리로 막겠다는 것이냐? 만약 당신들이 불만이 있다면 얼마든지 덤벼라. 14년 동안 지붕 아래에서 잠을 잔 적이 없는 게르만족의 용맹을 보여주겠다."라면서 황당하다는 어조의 답신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카이사르는 즉시 군대를 이동하여 라인 강 근처를 향해 이동하였고 아리오비스투스 역시 게르만족을 이끌고 이동하였습니다. 그동안 로마군은 게르만족의 용맹과 커다란 체구에 대한 묘사를 전해 듣고 겁에 질리기도 하였는데 카이사르는 동요하는 이들에게 교묘한 화법으로 그들을 단합케 한 뒤, 아리오비스투스의 군에 접근해 그와 직접 만나 회담을 가졌습니다.
아리오비스투스는 카이사르한테 그의 입장을 잘 설명하였지만 도중에 카이사르 휘하의 기병에게 게르만족 기병이 돌을 던지는 일이 있자 카이사르는 이것을 핑계삼아 돌아옵니다. 그 뒤 이들은 서로 대치하여 전투할 시기를 가늠하였습니다.
카이사르는 전투를 원하였지만 아리오비스투스는 달이 바뀔 때까지 기다려야한다는 점쟁이의 말을 듣고 전투를 미루었습니다. 그러자 카이사르는 대담하게도 게르만족의 진영에 바짝 다가가 진을 차린 뒤 아침마다 진에서 나와 게르만족의 코앞에다 병력을 포진시키는 일을 벌였습니다. 닷새에 걸쳐서 그 꼴을 지켜본 아리오비스투스는 마침대 군대를 내보내 로마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양군은 격렬한 전투를 벌이기 시작합니다.
아리오비스투스의 공격은 거셌고 양군의 거리가 가까웠으므로 로마군은 필룸을 던질 기회도 없이 바로 백병전에 돌입한다. 백병전이 벌어지자 무장의 질적 수준이 높은 로마군의 전투력이 돋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로마군과 게르만족의 전투는 치열하였는데 로마군은 게르만인들의 밀집 대형에 뛰어들어 그들의 방패를 낚아챈 뒤 찌르는 방식으로 싸웠습니다. 게르만족의 좌익은 이 공세를 견디지 못했으나 그들의 우익은 로마군의 우익을 거세게 공격하였고 이를 간파한 기병대장 크라수스는 3열에 포진한 로마군을 쪼개 우익에 합류하게 하였습니다. 이로써 로마군의 우익은 형세를 회복하였고 좌익이 무너진 게르만족은 전투가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여 전원이 패주하기 시작합니다. 게르만족의 수장인 아리오비스투스는 가족을 모두 버리고 라인 강에 이르러 배를 타고 강 건너로 달아났으며 이로써 카이사르는 게르만족을 완전히 패배시킵니다.
[갈리아 전쟁 1년째 : 전후]
카이사르는 자신의 군단을 모두 세콰니족의 영토에 주둔시킨 뒤 부관인 라비에누스에게 맡기고 북이탈리아로 돌아갑니다. 그동안 수도 로마에서는 삼두정치의 영향이 그대로 남아 삼두정파의 정치가들이 두 집정관의 직위를 꿰차고 있었으며 그 와중에 키케로가 카틸리나의 반란 진압 때 재판 없이 로마 시민을 처형한 문제로 재산이 몰수되고 국외로 추방당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때 갈리아에서는 카이사르가 게르만족을 패주 시킨 이후로도 병력을 철수시키지 않고 그대로 갈리아족의 영토에 남겨둔 것의 의도에 대해 미심쩍어하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로마가 게르만족이 했던 것처럼 갈리아족의 지배자가 되고자 한다는 의도가 있다고 의심하였으며 친 로마계 정치가들의 입지가 강화되는 것을 아니꼽게 본 이들도 많았습니다. 이들은 벨가이(벨기에인들의 조상)인들의 도움을 받아 로마군과 전쟁을 벌일 음모를 꾸몄고 이러한 소식을 전해 들은 카이사르는 이들과의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갈리아 전쟁 2년째 : 벨가이인들의 저항 움직임]
기원전 57년 카이사르는 겨울 동안 2개 군단을 추가로 편성하고 초여름에 속주의 6개 군단에게 합류케 한 뒤 갈리아의 곡식이 익을 무렵, 이탈리아를 떠난 카이사르는 그들과 합류합니다.
카이사르는 벨가이인들의 동태를 살폈고 이들이 군대를 구성하고 있다는 정보를 확인하자 전군을 이끌고 벨가이의 영토를 항해 진군하였습니다. 카이사르군은 보름 만에 벨가이인의 영토에 진입하였고 카이사르군의 갑작스러운 침공을 받은 레미족은 카이사르에게 항복하고 그에게 협조를 약속합니다.
카이사르는 레미족에게 벨가이인들에 대한 정보를 물었고 기왕 카이사르에게 붙기로 결심한 레미족은 성의껏 상세한 정보를 알려줍니다. 이들로부터 각 부족의 구성과 위치, 그리고 편성한 병력수를 물어본 카이사르는 벨가이인들의 맹주 역할을 하는 부족이 벨로바키족이라는 사실을 알아냅니다.
카이사르는 하이두이 족장인 디비키아쿠스를 불러냈고 그에게 하이두이족의 병력을 이끌고 벨로바키족의 영토를 짓밟으라는 요청을 합니다. 그 뒤 레미족의 볼모를 대거 얻어내어 그들이 배신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때 벨가이인들의 연합군은 레미족이 카이사르 쪽으로 붙었다는 사실을 알고 레미족의 영토를 향해 진군하였습니다. 이들은 레미족의 도시를 포위 공격하였고 레미족이 카이사르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그는 즉시 크레타 궁병과 발레아레스 투석병을 보내주어 도시를 지켜내게 합니다. 벨가이인들은 군을 철수한 뒤 카이사르의 본진으로 접근한다. 카이사르는 우선 기병전을 통해 적의 실력을 헤아린 뒤 전투를 결심합니다.
[갈리아 전쟁 2년째 : 벨가이인들과의 전투]
카이사르는 언덕을 배후에 두고 포진하였습니다. 로마군은 상대적으로 소수였고 따라서 그는 배치 뒤 양 측면에 참호를 파둔다. 벨가이인들과 로마군 사이에 작은 늪지가 있었는데 양군은 이것을 건너 공격을 감행하기 꺼렸으므로 서로 지켜보기만 하였고 늪이 없는 곳에서 기병끼리의 교전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기병전에서는 로마군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벨가이인들이 섣불리 늪을 건너지 못하리라 판단한 카이사르는 자신의 병력을 진영으로 물립니다.
이런 상황에서 벨가이인들은 병력을 쪼개 우회하여 로마군 진영의 배후로 돌아갑니다. 이들은 후방을 치든가 레미족의 영토를 유린하든가 둘 중 하나의 의도를 갖고 있었는데 이것을 지켜본 카이사르는 이들이 강을 건널 때 즉각 기동력이 뛰어난 기병과 경보병을 보내 이들을 급습하여 벨가이인들에게 큰 피해를 입힙니다.
벨가이인들은 그날 밤 회의를 소집하여 방어가 완벽한 위치에 포진한 로마군을 공격하는 게 여의치 않은 데다 군량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으므로 자신의 영토로 이동하기로 결정합니다. 또한 하이두이족이 앞서 카이사르의 요청대로 벨로바키족의 영토를 공격하려고 하였으므로 이들은 이곳에 오래 머물면서 싸울 의지가 없어졌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진을 거두고 퇴각하기로 하였고 밤 12시에 이를 감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퇴각은 모든 부족원이 동시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상당히 혼란스럽게 이루어졌습니다. 카이사르는 이들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치 못하였으므로 잠시 지켜보다가 이들이 진을 거두고 출발한 지 어느 정도 지난 동틀 무렵 기병을 보내 배후를 급습합니다. 기병이 출발하자 곧이어 티투스 라비에누스가 이끄는 3개 군단이 출발하였습니다.
기병이 후방을 치자 벨가이인들은 뒤돌아 서서 응전하였습니다. 하지만 전방부대는 로마군이 급습했다는 소식에 공포에 휩싸여 달아나기 시작했고 그러자 로마군에 응전하던 후방 부대 역시 전의를 상실합니다. 카이사르의 기병과 뒤이어 합류한 보병은 이들을 해가 질 때까지 추격했고 달아나는 벨가이인들을 살해합니다.
[갈리아 전쟁 2년째 : 네르비족과의 싸움]
승리의 여세를 몰아 주변 부족의 영토를 침공한 카이사르는 근방에 있는 수에시오네스족의 항복을 받은 뒤 벨가이인의 맹주인 벨로바키족의 영토로 진입합니다. 전황이 안 좋게 되자 벨로바키족의 내부에서 전쟁을 주동했던 정치가들은 브리타니아 섬으로 망명하고 벨로바키족은 카이사르에게 항복합니다.
맹주였던 벨로바키족이 항복하였지만 이것에 강력하게 반발한 네르비족은 그들의 부족만으로도 로마군에게 항전하고자 하는 의지를 품었습니다. 이들은 과거의 스파르타처럼 포도주 및 사치품을 모두 수입금지한 채 성인 남자들은 금욕적 생활을 유지하며 오로지 군사 훈련으로만 세월을 보내는 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이렇게 단련한 군대를 바탕으로 10개 부족을 지배하에 두고 있었습니다.
카이사르는 이들을 격파함으로써 로마의 패권에 불만을 품은 세력을 일소할 생각으로 군을 이끌고 네르비족의 영토를 향해 진군합니다. 네르비족은 첩보와 지형 면의 상대적 우위를 활용하여 행군 중인 카이사르의 군대를 급습할 작전을 세웁니다.
이들이 매복하기로 한 장소는 언덕 밑의 약간 트인 평지 끝자락에 위치한 숲 속이었습니다. 로마군이 이 평지에 진입하여 모습을 드러내자 네르비족은 숲에서 뛰쳐나와 로마군을 향해 돌진하였습니다.
이를 사비스 전투라고 부릅니다.
이 싸움에서 네르비족을 격파한 카이사르는 그들의 항복을 받아내고 네르비족을 지원했던 아투아투키족을 공격하기 위해 행군하였습니다. 그들은 본디 농성하기로 하였으나 로마군이 거대한 공성병기를 만들어 움직이자 겁에 질려 로마군에게 항복하였고, 카이사르는 이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그날 밤 아투아투키족은 인근에서 야영 중인 로마군을 야습하였는데 로마군의 반격으로 4천 명의 희생자를 낸 끝에 성내로 퇴각합니다. 아투아투키족은 다음 날 아침 성을 함락한 로마군에게 모든 주민이 노예로 팔려버립니다. 이는 신의를 저버린 자들에 대한 징벌적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갈리아 전쟁 2년째 : 전후]
이로써 벨가이족을 복속하는 데 성공했다고 판단한 카이사르는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를 보내 갈리아의 대서양 연안 부족들을 항복시키게 하였고 벨가이인들이 패퇴했다는 소식을 들은 갈리아족은 순순히 로마에 항복합니다.
이로써 카이사르는 갈리아가 완전히 평정되었다고 생각했고 이는 원로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따라서 원로원은 무려 15일의 감사제를 지냈는데 이는 폼페이우스가 동방원정을 마무리 짓고 연 12일의 감사제를 능가하는 규모였습니다.
당시 로마에서는 호민관 클로디우스의 폭주가 심해졌는데 그는 로마 시민에 대한 곡물 무상 배급을 실시했고 폭력단을 조직해 원로원과 유력 정치가를 협박하고 정치적으로 반대하는 집회에 돌격하여 훼방놓는 등 난동을 벌였습니다. 이에 대응하여 원로원 측도 호민관 밀로를 움직여 같은 폭력단을 조직해 대응케 하였습니다. 그 결과 로마 시내에선 양 폭력단의 패싸움이 비일비재하였고 클로디우스와 밀로는 서로 고소를 남발합니다.
원로원 중 옵티마테스파는 클로디우스의 전횡으로 그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자 슬쩍 클로디우스에 의해 추방당한 키케로를 불러들이려 하였습니다. 폼페이우스는 키케로의 복귀를 지지함으로써 정계를 주도하는 모습을 보였고 키케로의 귀국은 쉽게 가결됩니다.
그 뒤 원로원 의원들은 키케로 문제에 협조한 폼페이우스에게 감사의 뜻과 동시에 그에게 곡물 배급을 담당하는 임무를 수여하는데 이는 지중해의 해군을 거느리는 권한을 갖게 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폼페이우스에게 접근해 카이사르와 떼어놓으려는 속셈이었습니다.
[갈리아 전쟁 3년째 : 알프스부족과의 전쟁]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벨가이인들을 평정한 뒤 북이탈리아로 귀국하면서 군단장 갈바에게 12군단을 주어 알프스와 프랑스 국경 사이의 부족을 평정할 것을 명령합니다. 이는 카이사르가 알프스 산맥의 통행로를 욕심낸 것으로, 기존의 상인들은 이 지역을 지날 때마다 높은 통행료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카이사르는 이곳을 자신의 지배하에 넣어 로마인들에게 안전한 통행을 보장함과 동시에 통행세를 새로운 수입원으로 삼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갈바는 로마군의 명성을 바탕으로 별다른 저항 없이 이 지역 부족들을 복종시켰습니다. 하지만 로마군이 겨울 숙영에 들어가자 갈리아인들은 행동을 개시하여 3만 명에 달하는 군대를 조직해 로마군을 공격하였습니다. 갈바에겐 1개 군단만이 있었으므로 갈리아의 대군을 상대로 고전하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6시간에 걸쳐서 버티는 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마침내 로마군의 숙영지가 함락 직전에 이르자 갈바는 군단병 전원과 함께 숙영지에서 나와서 적진에 돌격을 감행하였습니다. 로마군의 돌격은 성공을 거둬 갈리아족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후퇴합니다. 간신히 갈리아족을 물리친 갈바는 즉시 숙영지를 불태우고 속주로 철수합니다. 따라서 카이사르의 의도대로 알프스 지역을 통치하에 넣는 시도는 일단 좌절되었습니다.
[갈리아 전쟁 3년째 : 대양 연안 부족과의 전쟁]
그해 봄, 여름 내내 갈리아는 조용했고 전례 없던 대규모의 감사제를 열었던 원로원과 시민의(Senatus Populusque Romanus 즉, SPQR) 생각대로 갈리아는 평정된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해 겨울에 접어들자 갑자기 일이 터졌습니다.
대서양 지역엔 푸블리우스 크라수스가 7군단과 함께 머물고 있었는데 크라수스는 겨울 숙영을 위한 식량확보를 위해 장교들을 주변 부족에 파견하였습니다. 그런데 부족들은 이 장교들을 억류한 뒤 카이사르가 복종의 대가로 거둔 볼모들과 맞교환하자고 요구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전해 들은 카이사르는 루카 회담을 치르는 중이었기 때문에 즉각적인 대응이 불가능하였습니다. 때문에 그는 우선 자신의 장교들에게 해군 편성을 지시하며 사태를 지켜봅니다. 전함은 갈리아 땅에서 대서양으로 흐르는 루아르 강에서 건조되었고 이 함대로 대서양 연안의 부족들과 해전을 치를 생각이었습니다.
마침내 겨울이 되어 루카 회담을 마무리 지은 카이사르는 군대로 돌아가 휘하의 7개 군단을 모두 이끌고 대서양 연안의 지역을 향해 행군합니다. 갈리아로 진입한 카이사르는 라비에누스에게 기병을 주어 전해에 평정한 벨가이인들의 영토로 보냈고 크라수스에겐 12개 대대(1군단 = 10개 대대)를 주어 갈리아 서남쪽으로 보냈습니다. 그 뒤 사비누스에겐 3개 군단을 이끌고 노르망디 지역으로 가서 그 지역의 부족들을 복속시키도록 하였고 브루투스에게는 로마군의 함대의 지휘권을 주어 대서양 연안의 반란 주동 민족인 베네티족을 공격하게 합니다. 카이사르는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베네티족의 영토로 침입합니다.
베네티족은 카이사르 군이 이르는 곳마다 철수한 뒤 섬으로 이주하여 지구전으로 나가기로 하였습니다. 따라서 카이사르는 제해권을 장악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브루투스가 해군을 이끌고 도착하자 각각 200척이 넘는 함대를 이끌고 전투를 개시합니다. 이 싸움에서 켈트족의 배가 더 크고 높이가 높아 로마군이 밀리자, 브루투스는 갈고리를 던져 적의 돛을 찢어버려 기동력을 무력화시켰는데 이는 노를 젓는 방식의 항해를 하지 않는 갈리아족 함대의 약점을 찌른 것이었습니다. 지중해의 전선의 경우 돛을 찢는다 해도 노가 있으므로 기동력이 무력화되지 않으나 갈리아인들의 배에는 노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베네티족 함대의 기동력은 무력화되고 이 배에 로마군의 배가 에워싸 하나하나 점령해 나가는 방식으로 갈리아의 해군을 격파합니다. 전투는 아침 10시부터 해질 때까지 계속되었고 베네티족은 항복합니다.
그 뒤 카이사르는 모리니족, 메파니족을 토벌하러 나섰는데 이들은 지금의 플랑드르 지역에 사는 민족이었습니다. 로마군이 이르자 이들은 숲으로 숨어버렸고 카이사르는 벌채를 하면서 진격했으나 그럴 때마다 이들은 깊숙히 숨어버렸기 때문에 결국 중단하고 퇴각합니다.
겨울이 찾아오자 카이사르는 병력을 사방에 보내 숙영을 하게 하고 자신은 이탈리아로 되돌아옵니다.
[갈리아 전쟁 3년째 : 전후]
당시 로마에서는 삼두정치의 결속력이 점점 약해졌었는데 그 이유는 크라수스에겐 정치력이 없는 데다 폼페이우스가 그다지 권력에 흥미를 보이지 않아 그 틈을 탄 옵티마테스 일파가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를 자신의 관할 속주에 있던 루카에 초대해 회담을 열어 그들의 결속력을 다지고 그들 각각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로 합의하였습니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다음 해에 집정관에 출마하기로 하였고 그다음 해에는 각각 스페인과 시리아의 총독이 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그의 임기를 5년 더 연장하기로 하였고 각 10개 군단을 거느릴 수 있는 권한을 갖기로 하였습니다. 이때 원로원 총수 600명 중 200명이 루카시에 왔다고 합니다.
[갈리아 전쟁 4년째 : 게르만족의 침입]
갈리아는 평온해진 듯 보였고 카이사르에게 모두 복종하고 있는 듯하였습니다. 이때 라인강 동쪽의 게르만족 중 우시페테스족과 텐크테리족이 강을 건너 갈리아의 영토 침입을 시도하였습니다. 이들은 메나피족을 격파하고 강을 건너는 데 성공합니다.
카이사르는 이들이 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듣자 바로 이탈리아를 떠나 갈리아에 복귀하였습니다. 이들을 무력으로 저지하기로 결심한 그는 갈리아인들에게 기병을 제공받은 뒤 게르만족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자 게르만족은 카이사르의 신속한 기동에 바로 사절을 보냈고 강화를 요청하였습니다. 카이사르는 라인강 밖으로 나가라는 요구를 하였으나 게르만족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대답합니다. 카이사르는 게르만족이 로마군을 만나기 전 타지역에 약탈을 보낸 기병대의 귀환을 위한 시간을 벌려는 수작이라 의심했습니다.
따라서 카이사르는 즉각적인 전투를 원하였는데 그렇다 해도 명분 없이 공격할 수는 없었고 따라서 카이사르는 자신의 기병부대를 적과 상당히 가까운 곳에 기동케하였습니다. 게르만족의 몇몇 부대가 로마군을 공격하여 전사자가 발생하자 카이사르는 전투를 결심합니다.
다음날 이 사건에 대해 게르만족이 사절을 보내 사과의 뜻을 전하려 하자 카이사르는 이들을 구금한 뒤 게르만족의 진영을 급습합니다. 이것은 완벽한 기습이었고 참패한 게르만족은 뿔뿔이 흩어집니다.
카이사르의 이러한 석연찮은 사절 구금과 기습에 대해 원로원 내에서도 상당한 논란이 생겼습니다. 삼두정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옵티마테스의 일원인 소 카토는 카이사르를 규탄한 뒤 그를 게르만인들에게 넘겨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반면 폼페이우스는 74명의 기병의 죽음으로 인해 교섭은 끝났으며 따라서 카이사르의 행동은 정당하다고 반박하였습니다. 그리고 결국엔 폼페이우스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 카이사르의 행동에 대해 죄를 묻지 않기로 결론이 났습니다.
[갈리아 전쟁 4년째 : 라인강 도하]
카이사르는 라인 강을 건너 게르만족의 영토에 침입하고자 하였고 이것은 로마의 어느 군사령관도 시도하지 않은 것으로 그의 군사적 업적이 상당히 돋보이게 하는 효과를 가져다줄 것이었습니다.
그는 게르만족에게 자신이 격파한 우시페테스족과 텐크테리족의 일부가 라인 강을 건너 다른 게르만족의 신세를 지는 것을 핑계 삼아 그들을 로마측에게 인도하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게르만족은 기가 막히다는 반응을 보였는데, 이는 카이사르가 끊임없이 게르만인들에게 라인 강을 건너 갈리아족에게 간섭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입장을 보였으면서 이젠 라인 강 너머에 있는 그들의 내정 문제에 관여하는 모순된 태도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수에비족에게 억눌려 살던 우비족은 이를 좋은 기회라고 보고 카이사르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카이사르는 이것을 핑계 삼아 라인 강을 건너기로 하였습니다.
카이사르는 다리를 놓았고 10일 만에 모든 군단과 함께 라인 강을 건넜습니다. 이때 수에비족은 로마군과 싸우는 대신 그들의 재산과 인구를 숲 속 깊은 곳으로 이주시키고 로마군을 숲 속으로 끌어들여 싸우기로 하였습니다. 카이사르는 이들을 추격하는 대신 우비족에게 협조를 약속받고 갈리아로 되돌아옵니다.
[갈리아 전쟁 4년째 : 브리타니아 원정]
게르만족의 영토 침입이 군사적 전과로 이어지지 않자 카이사르는 지금의 영국인 브리타니아 침략을 구상합니다. 카이사르가 브리타니아 원정을 하고자 한 이유는 브리타니아가 그동안 로마인들에게 완전히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땅이라는 점에서 라인강 도하를 능가하는 선전효과가 있으리라 판단한 듯합니다.
그는 지금의 도버 해협이 가장 건너기에 적합한 지형임을 파악하고 이 해협의 해안가에 있는 모리니족의 영토를 거점으로 삼습니다. 그 뒤 화물선을 모아 일단 2개 군단과 함께 출항하였습니다. 도착한 날은 기원전 55년 8월 26일.
브리타니아의 민족들은 병력을 모아 로마군의 함대가 보이는 해안가를 따라 이동하며 상륙을 저지하고자 하였습니다. 적당한 해안을 발견한 카이사르는 소수의 병력을 보내 브리타니아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고 그 뒤 본대를 작은 배에 나눠 태운 뒤 잇따라 상륙시키자 브리타니아군은 마침내 패배하여 달아났습니다. 상륙이 성공한 뒤 카이사르는 그들에게 볼모를 요구했고 약속을 받아냅니다.
목적을 달성했다고 판단한 카이사르는 갈리아로 되돌아가기로 하고 배를 항구에 정박시킵니다. 그런데 조수의 차이를 정확히 계산하지 못해 늘어난 바닷물로 인해 많은 배가 난파됩니다. 궁지에 몰린 로마군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배를 수리하지만 이 소식을 알아낸 브리타니아군이 로마군을 공격하기로 결정합니다.
가장 먼저 곡물 조달을 위해 나갔던 7군단이 공격을 받았고 카이사르는 직접 이들에게 합류하여 적을 격파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군을 이끌고 나타난 브리타니아군이 카이사르의 본영을 공격했고 로마군은 또다시 이를 격파합니다.
두 번의 승리로 브리타니아와 강화를 맺은 카이사르는 수리가 완료된 배와 함께 갈리아로 귀국하였습니다.
[갈리아 전쟁 4년째 : 전후]
브리타니아에서 돌아온 카이사르는 모리니족의 반란에 직면합니다. 그들은 로마군의 일부가 상륙하자 이들을 공격하였고 카이사르는 기병 전부를 보내 이들을 구원합니다. 그 뒤 라비에누스에게 전 군단을 주어 모리니족을 토벌케 하여 항복을 받아내고 사비누스와 코타를 보내 모리니족 북쪽에 살고 있던 메나피족을 토벌하게 하였습니다. 그 뒤 전 부대를 벨가이인의 영토에 남기고 북이탈리아로 돌아옵니다.
이때 수도 로마에서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집정관으로서 통치하던 때로 카이사르의 승전보를 전해 듣고 2년의 15일 감사제를 능가하는 20일의 감사제를 열기로 결정합니다. 이는 삼두파가 집정관직을 장악하고 있었던 데다 로마군이 한 번도 나간 적이 없었던 라인강 건너편과 브리타니아 지역을 원정했던 것이 시민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군사행동은 카이사르가 그의 권한 밖의 일을 한 것으로, 원로원파에겐 이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또한 그 해의 집정관이었던 크라수스는 겨울이 되자 파르티아 원정을 위한 병력을 편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의 아들인 젊은 크라수스는 카이사르가 보낸 2천 명의 갈리아 기병과 함께 귀국하여 크라수스에 합류하였습니다.
[갈리아 전쟁 5년째 : 2차 브리타니아 원정]
여름이 되자 이탈리아를 떠나 갈리아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두 번째의 브리타니아 원정을 계획합니다. 이것은 카이사르가 전 해의 브리타니아 침공 성과가 불충분하다고 느꼈고 브리타니아에서 두 부족을 제외하고는 볼모를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이번엔 기병으로 참여하고 있던 갈리아의 귀족들도 모두 데려가기로 하였습니다. 귀족들 중 특히 신분이 높은 이들은 기병 지휘관의 직책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카이사르의 결정에 대해 저 위의 갈리아 전쟁 1년째에 등장한 바 있던 둠노릭스가 강하게 반발하였다.
둠노릭스가 소속된 하이두이족은 바로 갈리아에 카이사르를 불러들인 부족으로 카이사르가 갈리아의 패권을 차지하자 그들은 갈리아 전체의 맹주로서의 입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실상은 카이사르가 하이두이족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우고 사실상 로마의 패권하에 갈리아를 편입시킨 것이지만 카이사르의 내정간섭은 별로 없었고 부족들의 자율을 배려하는 편이었으므로 과거 세콰니족을 내세우고 갈리아 전체의 패권을 가졌던 게르만인(수에비족)보다는 반발이 적었습니다. 따라서 하이두이 부족 내에서 카이사르를 불러들인 족장 디비키아쿠스의 정치적 입지는 튼튼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친형인 디비키아쿠스가 가지고 있는 족장직에 도전하는 둠노릭스는 불만이 많았고 또한 카이사르의 꾸준한 정치적 공작은 둠노릭스로 하여금 세력을 키우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카이사르에 의해 브리타니아로 동행하게 되자 마침내 분통을 터뜨리고 카이사르에게 반항합니다. 카이사르는 기어이 그를 동행시키고자 하였고 그를 엄중하게 감시하였는데 마침내 둠노릭스가 승선의 혼란을 틈타 탈영하자 카이사르는 곧바로 대부분의 기병을 보내 그를 추격하여 죽였습니다.
그 뒤 카이사르는 5개 군단과 기병 부대 대부분을 800척의 배에 승선시키고 도버 해협을 건너는 대규모 원정을 감행합니다.
1년 전처럼 브리타니아인들은 군대를 이끌고 로마군의 상륙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이번에는 그 규모가 너무 크자 겁을 먹고 군대를 내보내지 않았고 브리타니아군의 방해 없이 상륙한 카이사르는 10개 대대와 300의 기병을 남겨 배를 지키게 한 뒤 전군을 이끌고 적이 모인 곳으로 이동하였습니다.
브리타니아인들은 카이사르군과 정면으로 싸우기보다는 빼곡히 있던 숲의 지형을 활용해 게릴라전으로 버티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들은 카이사르군의 진격로 곳곳에 요새를 구축해 그의 진로를 방해한 뒤 로마군이 행군중일 때 공격하거나 숙영지를 건설할 때, 군량을 확보하거나 말을 먹이기 위해 초원에 기병을 풀어놓았을 때 공격하는 식으로 틈틈히 맞섰습니다. 로마군은 싸울 때마다 격퇴하였으나 브리타니아인들은 가벼운 무장을 한 이점을 활용하여 전체부대가 반응할 때 재빨리 숲속으로 퇴각하였습니다.
그렇다고 기병으로 추격하기도 마땅치 않았는데 브리타니아인들은 기병에겐 전차를 내보내 상대케 하였고 기병이 조금이라도 군단병에게서 멀어지면 일제히 전차에서 내린 보병들로 기병들을 공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기병 역시 군단병에게서 멀리 떨어질 수 없었고 따라서 브리타니아인들은 추격의 걱정 없이 공격하였습니다. 또한 충분한 수의 예비병을 후방에 두어 이러한 게릴라전에 지친 브리타니아인들과 재빨리 교대하는 식으로 체력의 저하를 막았습니다.
그러자 카이사르는 이 작전을 지휘한 브리타니아의 총사령관 카시벨라우누스의 영토를 침입합니다. 카시벨라우누스는 강건너에 부대를 집결시켜 로마군의 도하를 저지하려고 시도하였으나 로마군이 용감히 강을 건너 선봉부대를 패주시키자 즉각 군을 물리고 자신의 영토의 가축과 사람, 재산을 모두 숲속 깊은 곳으로 이주하고 로마군이 식량확보를 위해 조금만 흩어지면 즉시 공격하는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카시벨라우누스의 게릴라전, 청야전술의 활용으로 교착상태에 빠지게 된 카이사르는 카시벨라우누스에게 왕이 살해된 바 있던 브리타니아의 가장 유력한 부족 토리노반테스족과 강화를 맺고 그들에게 정보를 캐내 카시벨라우누스가 가축과 사람을 모아놓은 장소를 파악한 뒤 급습하였습니다. 이 급습은 성공을 거두어 카시벨라우누스의 부족은 상당한 피해를 입습니다.
카시벨라우누스는 카이사르가 자신의 진영을 급습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카이사르의 본군을 공격하는 대신 다수의 병력을 동원하여 해안가에서 배를 지키고 있던 10개 대대의 로마군을 공격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로마군의 수비는 매우 튼튼하였고 휘하의 병력이 간단히 격퇴당하자 카시벨라우누스는 마침내 카이사르에게 사절을 보내 강화를 요청하였습니다. 카이사르 역시 브리타니아를 정복하는 것은 그의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전군을 이끌고 브리타니아를 떠나 갈리아로 귀국합니다.
[갈리아 전쟁 5년째 : 14군단의 전멸]
겨울이 접어들자 카이사르는 자신의 부대들을 사방에 쪼개 숙영지를 건설하게 하였습니다. 그는 사비누스,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 마르쿠스 크라수스, 라비에누스, 파비우스, 로스키우스에게 군단을 쪼개 주어 각지에 배치합니다. 각 군단장들은 1개 군단씩 맡았지만 마르쿠스 크라수스는 예외적으로 3개 군단을 이끌었고 사비누스와 코타에게 14군단 전체와 다른 군단의 5개 대대를 맡겼다(1.5군단). 카이사르는 후방에 남아 군단이 배치가 완료될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였습니다.
이때 사비누스가 배치된 지역은 벨가이인의 영토에서도 가장 최북단으로 라인강 바로 옆에 붙어 게르만족과 바로 마주보는 상당히 위험한 지역이었습니다. 카이사르는 이 점을 고려하여 전투 경험이 풍부하고 여러 차례에 걸쳐 뛰어난 전공을 세운 사비누스를 지휘관으로 삼은 것이었습니다. 사비누스는 갈리아 전쟁 3년째에 3개 군단을 지휘하여 노르망디 지역을 복속시켰으며, 4년째엔 휘하부대를 이끌고 벨가이 지역의 최북단에 있던 메나피족을 복속시킨 바 있었습니다. 카이사르가 단독으로 부대를 지휘하게 맡긴 것은 푸블리우스 크라수스와 사비누스 정도였으나 푸블리우스가 없는 상황에서는 사비누스가 가장 신임할 수 있는 지휘관으로 보였지만 이것은 실수였습니다.
사비누스가 머물던 지역에 있던 갈리아 부족은 카르누테스족이었는데 카이사르의 후원을 받고 있고 부족장의 지위에 있던 타스게티우스가 공공장소에서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카이사르는 병력을 파견해 이 사건의 주모자를 체포하려고 하였고 이 때문에 이탈리아로 귀국하는 것이 잠시 지체된다.
이때 앞서 언급되었던 인두티오마루스가 사절을 보내 사비누스의 군단이 머물고 있었던 에브로네스 족장인 암비오릭스를 선동하여 로마인을 공격할 것을 선동합니다. 이들은 숙영지 건설을 위해 벌채하고 있던 로마군을 공격하여 죽인 뒤 대대적으로 사비누스의 진영으로 밀고 들어왔지만 로마군은 대응에 나서 갈리아인들을 격퇴합니다.
이러자 암비오릭스는 사비누스에게 사절을 보내 대화를 요청하였습니다. 로마 측에서 보낸 사절에게 암비오릭스는 로마군을 공격한 것이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부족민들이 벌인 사건이고 갈리아인 전체가 이미 공모키로 결정한 것에 따른 것일 뿐이며, 또한 게르만족의 대부대가 이미 라인강을 건너 이틀 뒤면 숙영지를 대대적으로 공격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자신은 친로마파이므로 갈리아족 전체의 의사를 따르기보다는 로마측에게 이것을 귀띔하고자 하는 것이니 게르만족이 이르기 전에 이 지역에서 철수하는 것을 권유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로마군이 갈리아족의 영토를 이동할 때의 안전을 약속하였습니다.
이 소식에 로마군은 꽤 당황하였는데 그 이유는 사비누스의 숙영지는 라비에누스나 키케로의 로마군과 달리 매우 외딴곳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비누스는 전군 철수를 주장하였지만 부장인 코타를 비롯한 백인대장들은 이미 무장하고 공격까지 감행한 적의 조언을 듣고 행동하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라며 강하게 반발합니다. 심야까지 이어진 토론에서 마침내 군단장인 사비누스의 의견이 우세하게 되자 결국 게르만족의 공격이 임박했다고 여긴 로마군은 다을 날 아침에 곧바로 철군을 감행합니다. 그들은 밤새도록 짐을 싸느라 한숨도 못 잤고 사비누스는 암비오릭스의 약속을 믿었으므로 전투 대형을 갖추고 퇴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들은 매우 긴 행렬을 이루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암비오릭스는 이 행렬을 급습하였습니다. 급습에 당황한 사비누스는 부대를 누비면서 지시를 내리긴 하였으나 그도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적의 급습을 예상한 코타는 부대에게 짐을 버리고 원진을 짜라는 지시를 내리지만 이것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그의 전기에서 실수라고 지적합니다. 그 이유는 짐을 버리면 부대원들의 사기가 저하되고 적의 기세는 올라갈 뿐 아니라 원진의 경우 적이 공격하지 않으면 싸울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카이사르의 지적대로 갈리아인들은 로마인을 공격하지 않은 채 원진을 에워쌌습니다. 그 뒤 돌격을 감행한 뒤 퇴각하여 로마군의 원진이 흐트러지면 그곳에 투창과 돌멩이를 던졌습니다. 이 상태는 하루 종일 지속되었고 로마군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로마군의 전투력은 갈리아족을 앞섰고 1.5개 군단은 결코 적은 수가 아니었으나 이러한 갈리아족의 대응에 의해 로마군은 싸울 기회 없이 점점 그 숫자가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이를 견디다 못한 사비누스는 암비오릭스에게 통역을 보내 목숨을 구걸하였습니다. 암비오릭스는 사비누스에게 회담하러 오라고 말한 뒤 사비누스가 오자 일부러 장광설을 늘어놓은 뒤 기습하여 그와 휘하 장교들을 살해합니다. 사비누스와의 동행을 단호히 거절한 코타는 그대로 남아 로마군을 지휘하였지만 사비누스를 죽인 뒤 사기가 오른 갈리아족의 돌격에 맞서다 장렬하게 전사합니다.
코타가 죽자 로마인들은 그들이 버리고 떠난 원래의 숙영지로 되돌아가기로 결심하고 갈리아족을 공격하여 이들을 뚫고 돌아가는 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밤이 되어 갈리아족의 공격이 중단되자 절망에 빠진 로마인들은 그날 밤 모두 자결하는 선택을 합니다.
살아남은 이들은 매우 극소수였는데 이들은 무장을 벗어던지고 소동 중을 틈타 숲 속으로 들어가 길도 없는 곳에서 나무와 숲을 헤치면서 간신히 가까운 라비에누스의 숙영지에 이르렀습니다. 이로써 9천에 달하는 로마 중보병이 전멸하였는데 이것은 카이사르가 벌인 갈리아전, 내전을 통틀어 가장 큰 타격이었습니다.
[갈리아 전쟁 5년째 : 키케로의 진영 급습]
14군단이 전멸되자 암비오릭스는 바로 기병과 함께 아투아투키족의 영지로 가 그들은 선동한 뒤 다음 날 네르비족의 영토로 가 그들을 선동하였습니다. 그는 이 기세를 놓치면 안 된다고 하였고 갈리아족의 호응을 받았습니다. 네르비족은 카이사르와 갈리아 전쟁 2년째에 사비스 전투를 치른 민족으로 이들은 그들 휘하의 10개 부족을 모두 동원하여 로마군을 공격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들은 영토 내에 숙영 하기로 되어있던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군단을 공격하기로 하였습니다.
사비누스의 군단이 괴멸된 데다 살아남은 군단병들은 가까운 라비에누스의 진영으로 향했기 때문에 키케로는 14군단의 전멸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키케로의 로마군은 숙영지 건설을 위한 벌채를 하다가 근처로 다가온 갈리아족의 습격을 받습니다. 갈리아족은 상당수의 기병을 이끌고 군단병을 휩쓸었고 군단병들은 사력을 다해 보루 안으로 들어가 이들을 맞섰습니다. 갈리아족은 사기가 매우 올랐으므로 거센 공격을 감행했지만 로마인들은 그날을 가까스로 버텨냅니다.
밤이 되어 공격이 중단되자 로마인들은 밤 동안 120개에 달하는 망루를 짓고 울타리를 보강합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마자 갈리아족은 엄청난 기세로 키케로의 숙영지를 공격하였고 로마군은 부상자들까지 가세해 한편으로는 적과 싸우고 한편으로는 수리해가면서 버텨냅니다. 그날도 버텨낸 로마군은 다시 밤을 새우면서 망루와 성채 방어용 창을 배치하고 벽에 나뭇가지로 장애물을 삼는 등의 공사를 진행하였습니다.
군단장인 키케로는 병에 걸렸는데 이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계속 잠을 자지 않고 로마군을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의 건강이 악화될 것을 우려한 병사들의 권유에 그는 전투가 벌어지지 않는 시간 동안 휴식을 취하였습니다.
로마군의 저항이 상당히 완강하자 갈리아인들은 회담을 청하면서 사비누스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전했는데 즉, 전 갈리아가 봉기하였고, 게르만족이 대군을 이끌고 당도하였으며, 카이사르의 다른 군단도 습격받았음을 전하며 철수를 권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사비누스 군의 괴멸을 통보하여 키케로는 비로소 14군단의 전멸을 알게 되었습니다.
키케로는 이에 대해 무장한 적의 권고를 따르는 것은 로마인의 전통이 아니며 카이사르에게 사절을 보내 그의 지시를 묻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따라서 다시 숙영지를 공격하기로 결정한 네르비족은 로마인들에게서 배운 바대로 보루와 참호를 둘러싼 뒤 공성병기까지 만들었다. 그 뒤 5일간에 걸쳐서 끊임없이 공격을 하였고 로마인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저항하였습니다.
이렇듯 갈리아인의 공세를 견뎠으나 로마인들은 소수였으므로 점점 부상병들의 수가 많아졌습니다. 키케로는 카이사르에게 전령을 보내는 것을 시도했으나 네르비족이 워낙 철통같이 자신의 숙영지를 포위하고 있었으므로 전령을 내보낼 수가 없었지만 키케로 진영에 머물던 네르비족 출신의 친로마파 정치가가 그의 노예를 적군으로 위장시켜 편지를 가지고 나가게 하면서 카이사르는 그날 오후 5시경에 이르러서야 키케로의 군단이 공격을 받는다는 급보를 받았습니다. 그는 곧바로 출발하였고 3개 군단을 이끄는 크라수스와 파비우스, 라비에누스에게 전령을 보내 가는 길목에서 대기하다가 자기에게 합류하라고 명령을 전했습니다.
그날 아침 9시경 크라수스의 3개 군단과 합류한 카이사르는 크라수스에게 1개 군단을 주어 돌려보내고 30킬로미터를 행군한 뒤 파비우스의 군단과 합류했습니다. 그리고 라비에누스는 상당수의 갈리아족이 접근하여 숙영지에서 움직이기 어렵다는 연락을 보냈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휘하의 2개 군단만을 이끌고 키케로의 숙영지로 이동했습니다.
카이사르는 키케로 군단의 사기를 붇돋우기 위해 갈리아 기병 한 명을 보내 행군 중이라는 서신을 전하게 합니다. 그 병사는 숙영지에 접근하는 데는 성공하여 카이사르가 직접 쓴 편지를 창에 묶어 숙영지에 던졌고 망루에 꽂혔습니다. 이 편지에서 카이사르는 자신이 도착하였다는 징표로 건물을 태워 연기를 피우겠다고 전하였습니다. 사흘째에 이 편지를 발견한 키케로와 로마 병사들은 기쁨의 환성을 지릅니다.
카이사르가 약속한 대로 모닥불을 피우자 네르비족도 로마군의 구원군이 당도한 것을 알았습니다. 이들은 포위를 푼 뒤 카이사르의 2개 군단을 공격하고자 하였습니다. 네르비족에게는 갈리아의 추가 병력이 합류하기로 되어있었고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전투를 서둘렀습니다. 카이사르에 의하면 그의 휘하엔 7천 병력이 있었다고 하고 네르비족은 6만 병력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는 적을 유인하기 위해 일부러 소규모의 병력인 것으로 위장하여 진영을 작게 짓고 그 뒤 적의 기병과 싸워 거짓 퇴각케 하였습니다. 그 뒤 겁먹고 혼란에 빠진 것처럼 일부러 보루와 문을 봉쇄하고 혼란스럽게 작업을 하게 합니다.
이 계략에 완전히 속아 넘어간 갈리아족은 전 병력을 이끌고 카이사르의 진영을 에워싸기 시작하였습니다. 카이사르는 진영의 문을 위장하여 풀로 덮었을 뿐인데 이들은 이 문이 굳게 닫친 것으로 생각하고 진영에 바짝 접근하였습니다.
카이사르는 이틈을 타 모든 병력으로 하여금 진영 밖으로 뛰쳐나가 적군을 항해 돌격하게 하였습니다. 이 기습은 허를 찔렀으므로 갈리아족은 급격히 무너졌습니다. 카이사르는 하루 종일 적군을 추격하였고 따라서 갈리아족의 병력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습니다.
적군을 격파한 카이사르는 키케로의 진영에 진입하여 키케로를 비롯한 군인들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였습니다. 병사들 중 부상을 입지 않은 자는 열 명 중 한 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때 카이사르는 정신없이 전투를 치르느라 병사들과 재회할 때 면도를 못해 수염이 얼굴을 덮고 씻지 못해 머리도 얼굴도 옷도 매우 꼬질꼬질했다고 합니다. 전쟁터에서도 항상 면도하고 깔끔 떨며 멋 부리기를 좋아했던 카이사르였던지라 키케로의 군단은 넝마주이 꼬락서니로 정신없이 나타난 카이사르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고 충성을 다짐했다고 합니다.
네르비족이 패배한 소문은 갈리아족 전체에게 퍼졌고 그들과 합류하기로 했던 이들은 모두 군을 이끌고 회군합니다.
[갈리아 전쟁 5년째 : 갈리아인들의 봉기 확대]
카이사르가 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로마군도 자신들과 같이 패배할 수도 있는 군대라는 것을 알게 된 갈리아인들은 계속해서 전쟁을 계획하였습니다. 이들은 사절을 주고받고 정보를 교환하면서 부족장끼리 모여 회의를 거듭하였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카이사르에게 계속 보고 되었고 카이사르는 북이탈리아로 귀국하지 않고 아예 갈리아에서 겨울을 보내기로 합니다. 이것은 카이사르가 최초로 갈리아에서 군대와 함께 겨울을 보내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군단장 파비우스를 원래 숙영지에 돌려보내고 자신은 키케로의 군단을 포함한 3개 군단과 함께 카이사르가 애초에 머물고 있었던 후방에서 지내기로 하였습니다.
그동안 사비누스의 14군단을 전멸시킨 당사자인 에브로네스족의 암비오릭스는 그대로 그의 영지에 있었고 다른 주모자인 트레베리족의 인투티오마루스는 다음해 봄에 있을 카이사르의 대대적인 반격에 대비하기 위해 라인강 너머의 게르만족을 설득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게르만족 중 강력한 부족 중 하나인 수에비족이 당한 참패에, 라인강을 건너 갈리아로 진입했다 일망타진당한 텐크테리족의 전례가 있어 이들은 갈리아에 들어가 로마군과 싸우는 것을 꺼렸습니다. 결국 다시 트레베리족의 영토로 돌아간 인투티오마루스는 계속 병력을 모았고 로마의 지배를 벗어나고자 하는 민족정신에 불타는 이들이 집결하자 자신감을 얻어 라비에누스의 숙영지를 급습하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 뒤 인투티오마루스는 숙영지를 포위한 뒤 계속 주변을 돌면서 싸움을 걸었지만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가 했던 것처럼 병력이 겁먹은 것으로 위장하면서 인투티오마루스의 도발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인투티오마루스는 자신감을 갖고 대담하게 로마군의 숙영지 진영을 돌았는데 마침내 그가 방심하고 있음을 파악한 라비에누스는 기습적으로 기병을 출격시켜 인투티오마루스를 살해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러자 구심점을 잃은 트레베리족은 와해되고 그 해의 갈리아는 평온하게 되었습니다.
[갈리아 전쟁 5년째 : 그 후]
그해에 로마에서는 크라수스가 원정준비를 마치고 파르티아를 향해 출병하였습니다. 또한 폼페이우스의 아내이자 카이사르의 외동딸인 율리아가 산욕열로 죽었고 출산한 아이도 며칠 뒤 사망합니다. 원로원에서는 카이사르가 속주를 통치하지 않고 멀리 국경 밖에 머물게 되자 이 상황을 호기로 보고 폼페이우스에게 접근합니다. 게다가 그해의 집정관 선거에서는 원로원파가 집정관 두 자리를 모두 차지하였고, 이런 상황들로 말미암아 수도 로마의 정국은 서서히 원로원파에게 주도권이 기울기 시작하였습니다.
[갈리아 전쟁 6년째 : 카이사르의 전쟁준비]
갈리아에 머물며 그대로 겨울에 병사들과 숙영 하던 카이사르는 1개 군단과 5개 대대의 전멸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국력은 강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3개 군단을 이탈리아에서 불러들이기로 결정합니다. 3개 군단 중 하나의 군단은 폼페이우스에게 빌리기로 하였는데 이것은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우정을 원로원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들은 각각 14군단, 15군단, 그리고 폼페이우스에게서 빌린 군단은 1군단이라 불렸으나 나중에 6군단으로 개칭된다. 14군단의 경우 사비누스에게 전멸당한 군단의 이름을 이어받은 것으로, 여기다 사비누스 휘하에서 같이 전멸당한 5개 대대를 새로 뽑아 보충합니다. 따라서 카이사르는 그해에 3.5군단을 증강하였으며 총 10개 군단을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병력의 수를 늘린 뒤 카이사르는 갈리아의 정보를 계속 수집하였는데 이때 라인강 연안에 있던 모든 갈리아인들이 카이사르와 대항하기로 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들은 게르마니아인들을 불러들여 로마군에게 대항하려고 하였고 따라서 이들 사이에 사절이 끊임없이 오가고 있었습니다.
[갈리아 전쟁 6년째 : 반란 부족의 토벌]
봄이 되자마자 카이사르는 즉시 4개 군단을 동원하여 키케로의 군단을 공격한 바 있던 네르비족의 영토로 진격하였습니다. 예상보다 빠른 로마군의 공세에 대비가 되어있지 않은 네르비족은 격파되고 약탈당한 뒤, 전리품은 분배되었습니다. 네르비족에게 볼모를 받은 카이사르는 군단 기지로 돌아가 갈리아 회의를 소집하였습니다.
이 회의에서 전해에 주모자였던 트레베리족, 에브로네스족을 비롯한 세노네스족, 카르누테스족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카이사르는 소집된 부족장들과 함께 지금의 파리로 이동한 뒤 족장들에게 일장연설을 한 뒤 군단을 동원하여 세노네스족을 향해 진격하였습니다. 이 진격에 대해 세노네스 부족장 아코는 항복하기로 하였습니다. 카이사르는 그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부족들에게서 기병을 소집한 뒤 전해의 사비누스 군단을 전멸시킨 바 있었던 두 부족인 트레베리족과 암비오릭스의 에브로네스족을 향해 진격하였습니다.
카이사르는 병사를 양분하여 2개 군단을 트레베리족의 영토에 있었던 라비에누스의 군단에게 보냈고 자신은 5개 군단과 함께 에브로네스족과 동맹을 맺고 있었던 메나피족을 향해 갔습니다. 메나피족은 또다시 숲 속으로 이주하려 하였으나 카이사르는 이들이 이것을 완료하기 전에 당도하였고 따라서 상당수의 물자를 약탈당합니다. 메나피족은 카이사르와 강화를 맺었습니다.
트레베리족은 대군을 모은 뒤 라비에누스를 공격하려 하였는데 카이사르의 2개 군단이 근처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퇴각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라비에누스가 계속 겁먹은 것처럼 위장하자 이들은 마음을 바꿔 카이사르의 증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라비에누스의 1개 군단을 공격하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라비에누스는 트레베리족의 공격을 격퇴합니다.
뒤이어 메나피족 문제를 매듭지은 카이사르는 본군과 함께 라비에누스가 있는 트레베리족의 영토에 진입하여 그의 군단을 휘하에 거둔 뒤 트레베리족의 부족장으로 친로마파 정치가를 임명합니다. 그리고선 계속 갈리아족과 연락하던 게르만족에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또다시 라인강을 건너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갈리아 전쟁 6년째 : 2차 게르만족 원정]
카이사르는 자신이 이전에 건넌 곳의 약간 위쪽에 다리를 놓아 도강을 시작하였습니다. 우비족은 사절을 보내 반란에 관여한 것은 수에비족이라 하였고 카이사르는 이것을 사실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수에비족은 카이사르에 대해 이전에 썼던 전략을 다시 썼는데 즉 숲 속 깊은 곳에 들어가 로마군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카이사르는 그들을 쫓아 숲속 깊은 곳에 가는 것을 보급 문제로 꺼렸으므로 전해와 마찬가지로 군대를 물려 퇴각합니다. 그는 성과가 없어 보이는 것을 우려했던지 자신의 전기에 갈리아인과 게르만인의 풍습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두었습니다.
[갈리아 전쟁 6년째 : 에브로네스족의 토벌]
에브로네스족은 바로 사비누스군을 전멸시킨 암비오릭스의 부족으로 카이사르는 이들을 토벌하고자 하였습니다. 에브로네스족은 작은 부족이었으므로 로마군과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한 채 계속 숲 속을 전전하며 피해 다녔습니다.
에브로네스족은 이때 그들의 재산을 깊은 숲 속 사방에 분산시켰는데 카이사르는 이것을 약탈하기 위해 로마군이 뿔뿔이 흩어질 경우 기습당할 것을 우려하였습니다. 때문에 그는 주변 갈리아 부족들에게 사절을 보내 숲에 흩어져 있는 에브로네스족의 재산들을 마음껏 약탈해서 소유하라고 부추겼습니다. 이것은 로마군이 아닌 갈리아인들에게 숲 속 깊은 곳을 공격하는 위험을 감수케 하고자 하는 의도였습니다.
카이사르의 제안은 약탈품에 욕심이 많은 갈리아인들에게도 좋은 제안이었기 때문에 상당한 호응을 받아 주변의 많은 부족들이 각기 군대를 이끌고 에브로네스족의 재산을 약탈하러 그 영토로 진입하였습니다. 이 소문은 갈리아 전역에 퍼졌는데 엉뚱하게도 라인 강 너머의 게르만족까지도 이러한 약탈에 욕심을 내었습니다. 국경 근처의 게르만족 일파 중 하나인 수감브리족은 기병 2천기를 모아 라인 강을 건너 에브로네스족의 영토로 들어가 눈에 띄는 족족 에브로네스족을 공격하고 약탈하였습니다. 이들은 숲에 익숙한 게르만인답게 늪과 숲을 간단하게 가로지르며 약탈하였습니다. 그러다 이들은 한 갈리아 포로로부터 카이사르군이 보급품을 한 군데에 모아놓았다는 소문을 듣습니다. 이곳은 바로 사비누스와 코타의 14군단이 숙영 했던 곳으로 카이사르는 이 장소를 수리한 다음 군단장 키케로에게 맡겼습니다. 게르만인들은 이곳을 습격하여 로마인들의 군수품을 약탈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키케로는 이곳을 굳게 지키다가 7일 동안 아무 일도 없자 병력을 밖으로 내보내 곡물을 징발하게 하였습니다. 이때는 로마의 9개 군단과 사방에서 약탈하러 온 갈리아족으로 인해 에브로네스족의 영토가 쑥대밭이 되고 있는 상황이므로 아무 일도 없으리라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느닷없이 나타난 게르만 기병이 문이 활짝 열린 키케로의 진영 내로 돌진하면서 신병으로 구성된 14군단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카이사르가 호기를 부린 덕분에 14군단이라는 이름과 과거 사비누스 휘하의 14군단이 전멸당한 장소라는 불길함을 안고 있었던 병사들은 공포에 떨었습니다. 이때 병에 걸려 진영 내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던 전 수석 백인대장 바쿨루스가 닷새 동안 먹지도 못한 몸에도 불구하고 병기를 갖추어 진문 앞으로 달려가자 병사들은 용기를 내서 맞서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병사들도 그들의 위치로 돌아가 게르만족과 싸울 채비를 하였습니다.
그 뒤 곡물을 징발하러 떠난 기병이 되돌아오고 로마인들이 보루를 지키는 모습을 본 게르만인들은 자신이 약탈해놓은 물품과 함께 라인 강을 건너 그들의 영토로 되돌아갔습니다. 게르만족이 떠난 뒤에도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은 데다 카이사르의 본군으로부터 소식이 끊긴 14군단은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카이사르는 본군과 함께 귀환하자 암비오릭스는 목숨을 건지게 되었습니다.
[갈리아 전쟁 6년째 : 그 후]
징벌적인 군사 원정을 마친 카이사르는 부족회의를 열어 이전 부족회의에 불참한 뒤 항복한 세노네스족의 부족장 아코를 처형합니다. 이때 카이사르의 의견에 따라 아코를 로마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처형하였는데 이는 채찍질을 한 다음 목을 베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은 모든 부족장들 눈앞에서 행해졌는데 이것은 카이사르가 상당한 월권행위를 한 것으로 비추어졌습니다. 이제껏 카이사르는 형식적으로나마 로마는 우방국이며 로마의 비호 하에 갈리아인들의 자치를 보장한다는 식의 태도를 보였는데 이번의 경우 로마에게 협력하지 않은 죄를 물어 한 부족의 통치자를 상당히 잔인한 형태로 처형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노골적으로 로마에 협력하는 것이 선택이 아닌 의무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었고 이것을 지켜본 부족장들에겐 이것이 로마가 노골적으로 본색을 드러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카이사르가 그동안의 태도를 버리고 노골적으로 강압적인 모습을 보인 것은 카이사르의 갈리아 총독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데다 옵티마테스 일파에게 주도권이 넘어가는 상황이었기에 서둘러 갈리아인에게 본심을 보이고 반발하는 이들을 군사적으로 진압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그리고 다음 해에 갈리아인들은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키게 되어 카이사르의 의도대로 되었지만 베르킨게토릭스라는 걸출한 인물의 존재를 예측하지 못하면서 카이사르는 하마터면 갈리아 전쟁을 실패할 뻔한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이렇게 일을 마무리 지은 카이사르는 자신의 부대를 갈리아 각지에 배치한 뒤 북이탈리아로 떠났습니다.
이때 파르티아에서 급보가 전해졌는데 크라수스가 카르헤 전투에서 전사하고 로마군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리고 로마 본국에서 민중파를 이끌던 클로디우스가 밀로의 무리와 패싸움하다 패배하여 살해당하였는데 이를 보고 분노한 민중들이 클로디우스의 시체를 원로원 회의장에 올려놓고 통째로 불태우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렇게 사회가 혼란에 빠지자 원로원은 평민들에게 여전히 인기가 많았던 폼페이우스를 독재관에 선출하여 수습하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을 소 카토가 약간 비틀어 독재관이 아닌 단독 집정관으로 임명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고 이를 폼페이우스가 받아들여 혼란한 사회를 수습하게 되었습니다.
[갈리아 전쟁 7년째 : 전 갈리아인들의 봉기의 시작]
로마에 협력하지 않았다는 석연찮은 죄목으로 세노세스족의 지도자 아코가 잔인하게 처형당하는 것을 목격한 갈리아의 부족장들은 카이사르에 대한 반감이 크게 생겼습니다. 이들은 로마에 대해 군사적으로 대항하기로 결심하고 모여 회의를 하였습니다. 갈리아의 부족장들이 카이사르 몰래 모인 이 회의에서 이들은 카이사르가 북이탈리아에 갔으므로 그를 갈리아에 진입해 부대를 지휘하는 것을 막으면 그들에게도 승산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때 노르망디 지역을 지배하던 카르누테스족은 카이사르 몰래 서로 볼모를 교환하는 것은 어려우니 그들이 총대를 매고 그들 영토에 있었던 로마 시민들을 모두 습격해 죽임으로써 로마에 대항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겠다고 전하였습니다. 이 결심에 대해 회의에 참석한 부족장들 모두 찬사를 보내며 그 부족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서약하였습니다. 그 뒤 카르누테스족이 정말로 로마 시민들을 습격해 모두 살해하자 이 소문은 갈리아 전역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갈리아 전쟁 7년째 : 베르킨게토릭스의 등장]
갈리아인들 중 갈리아 남부지역을 지배하고 있는 아르베르니족이 있었습니다. 이 부족의 최고 귀족 출신으로 베르킨게토릭스라는 청년이 있었는데 그는 부족장의 지위를 놓고 암투를 벌인 아버지가 살해당하고 족장직을 차지한 숙부에 의해 추방당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 뒤 그의 숙부가 친로마적 행보를 보였는데 갈리아 전역에 반로마 정서가 커지자 베르킨게토릭스는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아르베르니족을 공격, 숙부를 추방하고 족장직을 차지하게 됩니다.
아르베르니족을 거느리게 된 베르킨게토릭스는 주변에 있던 갈리아 부족들에게 사절을 보내 이전에 족장끼리 모여 반로마의 서약을 한 것을 준수하라고 하였고 이것은 모든 이의 호응을 받습니다. 이들은 베르킨게토릭스를 갈리아의 총사령관으로 추대합니다. 그는 각 부족에게서 볼모를 받아내고 병력과 무기의 공출을 요구하였습니다. 규율을 엄격히 세워 어긴 자들을 처형함으로써 지휘체계를 단단히 굳힙니다.
이때 카이사르의 주요 우방 부족이었던 하이두이족에게 베르킨게토릭스의 공격을 받은 비투리게스족에게서 구원 요청이 왔습니다. 하이두이족은 그곳에 머물고 있었던 로마 측 장교와 상의한 뒤 병력을 급파했으나 곧바로 병력을 철수시켰습니다. 하이두이족은 비투리게스족이 함정을 팠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으나 카이사르는 이 말의 신빙성을 의심하였습니다. 하지만 비투리게스족은 곧바로 베르킨게토릭스에게 붙었습니다.
[갈리아 전쟁 7년째 : 카이사르의 귀환]
북이탈리아에서 이 소식을 들은 카이사르는 갈리아족이 길목을 차단하여 쉽게 갈리아에 있는 군단 기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파악하였습니다. 하지만 베르킨게토릭스의 움직임이 기회를 주었는데 그가 카이사르를 묶어놓기 위한 의도로 대군을 이끌고 나르보를 향해 이동한 것이었습니다. 카이사르는 나르보로 이동한 뒤 방어체계를 구축하고 기병을 이끌고 아르베니족의 영토로 향했습니다.
아르베르니족과 나르보 사이엔 산맥이 하나 있었는데 카이사르는 허를 찌르기 위해 이 6피트에 이르는 눈을 뚫은 뒤 산맥을 가로질러 아르베르니족의 영토에 도달하였습니다. 예기치 못한 로마군의 출현에 아르베르니족은 당황하였고 이들은 베르킨게토릭스에게 구원을 요청합니다. 자신의 부족을 무시할 수 없었던 그는 병력을 이끌고 구원하기 위해 이동하였습니다.
카이사르는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기병을 맡긴 뒤 소수의 병력만 데리고 비엔나에서 게르만 기병을 인계받습니다. 그 뒤 하이두이족의 영토를 가로질러 링고네스족의 영토에 머물고 있던 2개 군단의 숙영지에 도착했고 동시에 트레베리족의 영토에 머물던 2개 군단에게 6개 군단이 머물고 있던 아게딘쿰(상스)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린 뒤 자신 역시 휘하의 2개 군단을 이끌고 아게딘쿰으로 이동하였습니다. 베르킨게토릭스가 대응하기 전에 이 집결은 완료되었고 카이사르는 10개 군단을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갈리아 전쟁 7년째 : 카이사르의 진격]
10개 군단이 아게딘쿰에 있는 군단 숙영지에 집결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베르킨게토릭스는 병력을 이끌고 북상하였습니다. 그는 카이사르의 주요 우방민족인 하이두이족에 종속되어있던 보이족의 도시 고르고비나를 포위하였습니다. 이때는 아직 늦겨울이었으나 곡식 조달에 어려움을 겪었던 카이사르는 보이족이 무너질 경우 주변 갈리아 족들이 로마가 우방국을 보호하지 못한다는 판단을 내릴 것이라고 생각해 구원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는 2개 군단을 숙영지에 남기고 8개 군단을 이끌고 남하하였습니다.
카이사르는 군량 조달을 위해 근처에 있던 케나붐을 공략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는 우선 벨라우노두눔을 점령하고 나서 군대를 이끌고 서둘러 케나붐에 도착합니다. 카이사르군의 진격이 예상보다 빨랐으므로 케나붐의 주민들은 서둘러 강을 건너 달아났습니다. 카이사르는 즉시 병력으로 도시에 진입하게 한 뒤 이 도시를 약탈한 뒤 불사릅니다. 그뒤 남하하여 노비오두눔을 향해 출발하였습니다.
노비오두눔은 베르킨게토릭스가 포위한 고르고비나의 바로 근처에 있던 도시였습니다. 노비오두눔의 주민들은 항복했지만 베르킨게토릭스의 군대가 당도하자 배신하고 다시 갈리아측에 붙습니다. 두 병력은 우선 소수의 기병전을 벌였는데 400기의 게르만 기병의 활약으로 로마측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노비오두눔 주민들은 반란 주모자를 모두 붙잡아 로마측에 넘기고 다시 항복합니다.
[갈리아 전쟁 7년째 : 초토화 작전]
겨울철이라 군량 조달이 원활하지 않은 로마군은 계속 도시를 점령하고 곡식을 얻는 식으로 진격하였습니다. 3개에 걸친 도시가 연달아 함락당하자 (벨라우노두눔 → 케나붐 → 노비오두눔) 베르킨게토릭스는 로마군을 상대로 도시를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그는 이럴 바엔 도시를 완전히 불사르고 전 주민을 이주시키는 방식으로써 로마군의 현지 조달을 차단하기로 하였다.
이 결정은 족장들의 동의를 얻었고 하루 만에 로마군 주위의 20여 개 도시가 비워지고 불태워졌습니다. 카이사르는 그가 머무는 곳에서도 각지가 불타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아바리쿰이라는 도시가 있었는데 이 도시는 갈리아에서 아름답기로 이름난 곳이었습니다. 이 도시의 소유자인 비투리게스족은 아바리쿰을 불태우는 것만은 말아줄 것을 요청하며 이 도시를 방어할 수 있다고 자신하였습니다. 이들의 애원은 간절하였으므로 베르킨게토릭스는 이 도시를 방어하는 것을 승낙합니다.
이렇게 구체적인 전략을 세운 뒤 베르킨게토릭스는 자신의 대군을 로마군을 추격하면서 전투를 피하고 로마군이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흩어질 때만 공격하였습니다. 이 전법은 효과를 보아 로마군은 군량을 조달하기도, 또한 전투를 할 수도 없는 곤란한 상황에 빠졌습니다.
이에 따라 카이사르는 주변 도시 중 유일하게 온전히 남아있는 아바리쿰을 점령하여 군량을 조달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카이사르는 8개 군단을 거느리고 있었으므로 3개 도시에서 조달한 군량은 금방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인근의 하이두이족에게 군량보급을 요청하였으나 이미 갈리아 전체가 카이사르로부터 등을 돌렸음을 파악한 하이두이족은 카이사르에게 협조적이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아바리쿰을 포위했을 땐 곡기없이 가축을 잡으면서 버텨나가야 했습니다.
[갈리아 전쟁 7년째 : 아바리쿰 포위전]
아바리쿰은 거주민들이 로마군단을 상대로 방어를 자신할 정도로 지형적으로 유리했습니다. 도시를 강과 늪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으며 접근로는 한 군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로마군은 8개 군단에 달했고 또한 이 도시를 점령해 식량을 조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로마군 역시 사력을 다해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포위 공격 도중 베르킨게토릭스가 군대를 이동한다는 첩보를 받은 카이사르는 서둘러 전쟁을 끝낼 목적으로 병력을 이끌고 그를 기습하러 밤에 떠났습니다. 하지만 베르킨게토릭스는 첩보를 통해 카이사르의 이동을 파악했고 로마군이 도착했을 땐 유리한 고지에 이미 병력을 배치한 상황이었습니다. 카이사르는 공격이 여의치 않자 철수합니다.
카이사르군이 물러난 뒤 잠시 갈리아족 진영에서는 베르킨게토릭스의 무모한 군대 이동에 대해 비판하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인 포로를 불러들여 그들이 식량이 떨어져 곤경에 처한 것을 증언하게 하여 위기를 모면합니다.
그 뒤 로마군은 공성병기로 아바리쿰을 공격하는 한편 높은 둑을 쌓아갔습니다. 갈리아인들은 이것을 훼방하기 위해 로마군의 망루를 계속 공격했으나 로마인들도 끝까지 버텼습니다. 공사가 막바지에 이르자 갈리아인들은 밤에 성문에서 모두 출격하여 로마인과 전투를 벌였고 동틀 때까지 싸웠지만 로마군의 포위를 뚫을 수도, 그리고 이들의 공사를 훼방 놓을 수도 없었습니다. 갈리아군과 로마군은 끊임없이 지친 병사를 교대해가면서 싸웠지만 전투가 거듭될수록 무장과 훈련이 잘 된 로마군이 우세하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격퇴당한 비투리게스족은 절망에 빠졌고 마침내 성 외각에 주둔한 베르킨게토릭스가 성내로 사절을 보내 성을 버리고 자신에게 합류하라고 권고합니다. 성이 점령되면 로마인들의 살육과 약탈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므로 공포에 질린 갈리아 남자들은 자신들을 따라갈 수 없는 여자와 아이를 뒤에 남기고 밤에 한 덩어리로 로마군 진영을 뚫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을 알게 된 여자들은 남편들에게 나가지 말라고 애원하였고 남자들이 듣지 않자 여자들이 일제히 소리를 질러 로마인들에게 이들이 탈출할 것임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비투리게스족은 성 밖으로의 탈출을 단념합니다.
다음날 마침내 둑이 완성되자 이 둑을 타고 성 위로 일제히 돌진한 로마군에 의해 성벽이 점령되고 아바리쿰은 순식간에 함락되었습니다. 로마군은 굶어가면서 공성전을 벌였으므로 울분에 차있는 상태였고 카이사르는 이들에게 약탈과 살육을 허가합니다. 이로써 도시에 있던 4만에 달하는 갈리아인과 그들의 처자식이 모두 학살됩니다. 이 싸움에서 생존한 아바리쿰 거주민들은 고작 800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갈리아 전쟁 7년째 : 게르고비아 전투]
아바리쿰의 점령은 이것을 예견한 베르킨게토릭스의 입지를 단단히 굳혀주었고 카이사르는 필요한 군량을 얻어 한숨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이때 하이두이족은 부족장 선출문제로 내분을 겪고 있었는데 카이사르는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를 부족장으로 선출하기 위해 하이두이족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여 콘빅톨리타비스를 족장으로 뽑게 합니다. 그 뒤 하이두이족에게 보조병으로 그들이 가진 기병 전원과 1만 보병을 요청합니다.
이렇게 배치한 뒤 카이사르는 병력을 양분해 4개 군단으로 하여금 라비에누스에게 주어 루테티아(파리)를 공략케 하고 자신은 6개 군단을 이끌고 베르킨게토릭스의 부족인 아르베르니족의 수도 게르고비아를 공략하고자 하였습니다. 즉 카이사르에겐 8개 군단이 휘하에 있었고 2개 군단은 아벤디쿰(상스)에 머물고 있었는데 라비에누스에게 2개 군단을 내주어 아벤디쿰에 머무는 군단병과 합류 뒤 북상하여 루테티아를 공격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병력을 쪼갠 것은 카이사르가 큰 실수를 한 것이었는데 게르고비아는 베르킨게토릭스의 반군이 있는 곳으로 거센 저항이 있을 것이 분명함에도 카이사르는 저번보다 더 적은 병력으로 공격에 나선 것이었습니다.
카이사르가 남하하자 베르킨게토릭스는 강의 다리를 파괴하고 도하를 막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에 대응하여 카이사르는 본군이 있는 것으로 위장한 뒤 2개 군단을 기동하여 다리를 건넜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베르킨게토릭스는 병력을 철수합니다.
그 뒤 카이사르는 게르고비아에 도착하였는데 하이두이족의 족장 콘빅톨리타비스가 음모를 꾸민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콘빅톨리타비스는 카이사르에게 보낸 1만 보병과 다수의 기병을 리타비쿠스에게 이끌게 한 뒤 적당한 기회를 보아 병사들을 선동하게 하였습니다. 이 지시대로 리타비쿠스는 병사를 선동하여 그들과 동행한 로마인들을 습격해 죽였습니다. 이 첩보를 들은 카이사르는 즉시 6개 군단과 함께 이 병사들에게 접근해 이들의 항복을 받았고 리타비쿠스는 달아났습니다. 이때 베르킨게토릭스는 어떻게 카이사르가 떠난 것을 알았는지 2개 군단이 남은 로마군의 진영을 본군 전원을 동원하여 공격하였고 하마터면 함락당할 뻔하였습니다. 카이사르는 재빨리 진영으로 복귀하였습니다.
카이사르가 이러는 동안 리타비쿠스의 첫번째 전령이 보낸 소식을 믿은 하이두이족은 그들 영토에 있었던 로마인들을 대거 습격하여 죽이고 재산을 빼앗았습니다. 하지만 뒤이어 도착한 전령에 의해 카이사르가 진압했다는 소식을 들은 하이두이족은 다시 태도를 바꿔 관련자를 처벌한 뒤 카이사르에게 해명을 하는 사자를 보냈습니다.
이렇게 하이두이족이 계속 태도를 바꾸자 그들의 협조를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 카이사르는 병력을 철수할 것을 계획합니다. 하지만 그냥 퇴각할 경우 갈리아인들에게 자신이 베르킨게토릭스를 당할 수 없어서 퇴각한 것으로 보일 것을 우려한 그는 강력한 공격으로 큰 타격을 준 뒤 퇴각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 뒤 카이사르는 갈리아족이 집중적으로 수비하는 진영에 공격할 것처럼 소란을 피워 수비를 굳히게 한 뒤 갈리아족의 수비가 느슨한 곳에 주력을 보내 급습하였습니다.
공격 나팔이 불리자 로마군은 단숨에 갈리아의 3개 진영을 점령한 뒤 게르고비아 성벽 바로 앞까지 진격하였습니다. 이 급습에 갈리아인들은 완전히 당황하였고 이것에 목적을 달성했다고 판단한 카이사르는 퇴각나팔을 불었습니다. 하지만 퇴각나팔을 듣지 못하고 기세를 탄 로마군은 그 자리에 남아 성벽에까지 오르려고 하였습니다. 갈리아인들은 황급히 주력군을 로마군이 있는 곳으로 보내기 시작하였고 점점 갈리아인들의 수가 늘어나자 적진 깊숙이 있던 곳까지 당도한 로마군은 포위되어 10군단의 도움으로 약간의 수가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로마군은 46명의 백인대장이 죽고 700명의 병사가 목숨을 잃는 패배를 당했습니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병사들을 꾸짖고 격려한 뒤 즉시 게르고비아에 철수하는 한편 하이두이족이 배반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들의 영토로 이동하였다.
[갈리아 전쟁 7년째 : 하이두이족의 반란]
게르고비아의 패배로 전 갈리아가 카이사르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갈리아 전쟁 첫해에 카이사르를 불러들인 뒤 갈리아의 패권자 노릇을 하던 하이두이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선 카이사르 밑에 종군하던 두 갈리아 귀족들이 카이사르에게 하이두이족의 모반이 있을까 두렵다고 떠나길 요청하였습니다. 카이사르는 이들이 카이사르 밑에서 벗어나려는 핑계임을 알았지만 이들을 돌려보내기 전에 나눈 대화에서 자신이 하이두이족에게 그동안 베푼 것이 크지 않았냐고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소용없었고 이 둘은 하이두이족에게 돌아가자마자 카이사르에게 적대적이었던 부족장과 영합하여 로마인들을 죽인 뒤 그들이 맡고 있었던 부족들의 볼모를 손에 넣고 카이사르에게서 지키기 어려운 도시들을 모두 불살라버렸습니다.
이렇게 되자 고립된 카이사르는 역시 적진의 한 복판에서 고립된 라비에누스의 4개 군단을 구원하고자 강행군을 하여 론 강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뒤 인근에서 가축을 약탈하여 식량을 보충한 뒤 갈리아 중부로 이동하였습니다.
라비에누스는 4개 군단으로 루테티아(파리)를 공격하기 위해 북상하였다가 카이사르의 패배 소식을 듣고 철수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는 밤중에 대담하게도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부대를 기동시킨 뒤 적이 이 소리를 듣고 병력을 분산시킬 때 적의 진영 하나를 전군으로 공격하여 격파한 뒤 무사히 철수합니다. 그 뒤 라비에누스는 남하하여 그를 향해 오고 있었던 카이사르에게 합류하였습니다.
한편, 하이두이족은 카이사르가 붙잡아 두고 있었던 볼모를 빌미삼아 갈리아족들에게 자신들을 맹주로 삼을 것을 요구하며 베르킨게토릭스에게 자신들에게 오라고 하였습니다. 베르킨게토릭스가 모든 부족장과 함께 그들에게로 오자 이들은 총지휘권을 요구하였지만 부족장 회의에서 나온 표결에 의해 만장일치로 베르킨게토릭스가 승리합니다. 하이두이족은 어쩔 수 없이 베르킨게토릭스를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갈리아 전쟁 7년째 : 베르킨게토릭스의 큰 실수]
자신에게 등을 돌린 갈리아로부터 기병을 모집할 수 없게 되자 카이사르는 게르만족을 대상으로 용병을 모집하고 속 주민들로부터 모집한 22개 대대로 하여금 속주를 방어케 하고 세콰니족의 영토를 향해 갔습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세콰니족은 로마 속주와 인접하였으므로 이곳을 점령한 뒤 속주의 지원을 받으며 다시 갈리아를 공격할 생각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때 베르킨게토릭스는 각 부족에게서 병력을 공출할 것을 요구하였고 따라서 상당한 대군을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이 병력에 자신감을 얻었는지 그는 이때 갑자기 그동안의 초토화 작전을 버리고 카이사르의 로마군을 공격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부관들에게 말하길 로마군이 군수품을 수송하는 지금이 바로 공격하기 적합한 때이며 로마군은 군수품을 지키기 위해 뿔뿔이 흩어질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로마군은 이미 7년의 무수한 전투로 싸움에 상당히 익숙해졌으므로 급작스러운 상황에도 대처능력이 뛰어났고 카이사르가 또한 우수한 장군이었으므로 이러한 돌발적인 공격에도 잘 대응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카이사르의 병력은 로마 군단병만 10개 군단에 달했는데 그들이 모두 장기간의 전투로 단련된 군인들임을 감안한다면 베르킨게토릭스가 전투를 건 것은 상당히 무모한 결정이었습니다. 카이사르가 훗날 폼페이우스를 격파하였을 때 그는 같은 군단병들을 단 8개 군단을 동원하였고 이것도 그나마 정원을 크게 밑도는 2만 2천여 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베르킨게토릭스가 맞닥뜨린 로마군은 10개 군단에 정원 수도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폼페이우스가 상대한 카이사르 군의 두 배에 가까운 전력을 상대로 전투를 건 셈이었습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기병 특유의 빠른 기동력으로 포위 작전을 사용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기에 이러한 전술로 나온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로마군의 경우 조직적이면서도 유동적인 분대의 기동이 가능하였으므로 포위 전술에도 재빠른 원진을 쳐서 대응하는 게 가능하였다.
또한 당시 카이사르가 처한 상황은 이전 6년에 걸친 갈리아 지역을 모두 포기하고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상당히 절박한 때였습니다. 그가 가진 볼모는 하이두이족의 배신으로 모두 잃은 상황이었으며 점령하고 휘하에 넣은 부족들도 모두 배신한 상황이었습니다. 카이사르가 속주의 지원을 받으면서 갈리아로 다시 진격한들 베르킨게토릭스가 기존에 했던 대로 회전을 피하면서 보급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나가면 그가 남은 임기인 1년 반 동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다지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카이사르도 이것을 알고 있었으며 따라서 그는 당시 자결을 생각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베르킨게토릭스는 친히 자신의 대군을 이끌고 카이사르 군단의 정면으로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카이사르에게는 엄청난 횡재였고 베르킨게토릭스에겐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던 것입니다. 물론 베르킨게토릭스는 갈리아 사람들의 요청을 무시할 수 없었고, 나름 승산도 있다고 판단하여 전투를 벌인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뒤이어 벌어진 전투에서 베르킨게토릭스는 군대를 세 부분으로 나눠 로마군에게 돌격하였습니다. 로마군도 즉시 세 부분으로 나누어 대응하였습니다. 계속된 전투에서 로마군의 우익이 갈리아군의 좌익을 격파하고 오른쪽 언덕을 점거한 뒤 베르킨게토릭스가 있는 보병부대를 향해 돌격하였습니다. 베르킨게토릭스가 달아나자 갈리아군 전원이 등을 돌려 달아났고 로마군은 이들을 추격하여 마음껏 살육하였습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황급히 달아나면서 눈에 띈, 근처의 도시인 알레시아로 안으로 들어간 뒤 문을 굳게 닫았습니다. 카이사르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며 그는 모든 군단병을 동원하여 알레시아를 겹겹이 에워쌌습니다.
[갈리아 전쟁 7년째 : 알레시아 전투]
알레시아는 대군을 수용할 준비가 되지 않았고 베르킨게토릭스가 벌인 청야전술 때문에 베르킨게토릭스는 군량 부족에 시달립니다. 이를 구원하기 위한 갈리아 민족은 대군을 이끌고 알레시아에 당도하여 베르킨게토릭스와 앞뒤로 세 차례에 걸쳐 로마군을 공격하였으나 카이사르의 로마군은 이들의 공격을 격퇴하고 군량이 바닥나 버틸 수 없게 된 베르킨게토릭스는 끝내 항복합니다.
[갈리아 전쟁 7년째 : 그 후]
갈리아 민족을 규합하여 대항한 베르킨게토릭스마저 로마의 포로가 되자 갈리아인들은 더 이상 로마에 대항할 의지가 완전히 꺾입니다. 이들은 카이사르에게 사절을 보내 항복하였고 이를 받아들은 카이사르는 그들이 로마인들을 습격해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죄를 묻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아직 1년의 임기가 남은 카이사르는 자신의 군단병과 함께 숙영하며 전후처리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체의 봉기를 제압한 상황에서 사실상 갈리아 제패가 끝났다고 판단하였고 더이상 갈리아 전기를 작성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시각은 원로원도 마찬가지였고 이들은 20일의 감사제를 지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카이사르의 군사적 업적은 로마 시민들 사이에서 매우 유명해졌습니다. 카이사르는 그가 지휘한 전쟁 상황을 상세히 적은 갈리아 전기를 출간하면서 이러한 유명세에 기름을 붓습니다. 이것에 위기를 느낀 원로원파와 카이사르의 군사적 명성이 자신을 능가하게 된 것을 불편하게 여긴 폼페이우스는 서로 협력하는 입장으로 돌아섰습니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가 젊은 크라수스라는 애칭으로 부른 바 있던 푸블리우스 크라수스의 미망인이자 원로원 의원 메텔루스 스키피오의 딸과 재혼함으로써 원로원파와 인척관계를 맺습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의 히스파니아와 북아프리카 총독 임기를 5년 더 연장하였고 그의 10개 군단 지휘권도 그대로 인정합니다. 이렇게 폼페이우스가 군사력을 갖게 된 것은 카이사르가 1년 뒤에 군단 지휘권을 내려놓게 되는 상황에선 상당히 위협적인 일이었습니다.
그 뒤 이들은 카이사르에게 불리한 법안을 제출하였는데 이것은 집정관에 입후보하려면 총독과 군단 지휘권을 내려놓고 민간인의 신분으로 입후보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민간인 신분이 되면 군사력 배경도 없는 데다 고발당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은 명백히 카이사르를 노린 법안이었습니다. 이 당시엔 폼페이우스가 단독 집정관이었으므로 이것이 쉽게 통과됩니다만 카이사르는 일단 이것에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갈리아 전쟁 8년째 : 갈리아인들의 불온한 움직임]
베르킨게토릭스를 격파하는 데 성공한 카이사르는 사실상 갈리아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전 부대를 각지에 숙연케 한 뒤 갈리아 북부에 군대와 함께 남으면서 전후처리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군대가 숙영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갈리아족의 하나인 비투리 게스족이 모반을 꾀한다는 소문을 들은 카이사르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그들을 토벌하기로 하였습니다. 비투리게스족은 갈리아 남서쪽에 위치한 부족이었습니다. 카이사르는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신속히 기병과 함께 갈리아 북부를 떠나 중부로 이동한 뒤 그곳에서 숙영중인 13군단과 인근의 11군단을 이끌고 남하하여 그들의 영토에 이릅니다. 비투리게스족은 재빨리 카이사르에게 항복합니다.
그 뒤 비투리게스족이 자신들이 노르망디 지역의 카르누테스족에게 공격당한 것을 카이사르에게 호소하자 그는 근처의 14, 6군단을 소환한 뒤 그들과 함께 북상하여 카르누테스족의 영토로 침입합니다. 이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주변 부족들에게로 달아났습니다.
[갈리아 전쟁 8년째 : 벨로바키족과의 대결]
당시 벨로바키족은 카이사르와 동맹부족인 레미족을 침략할 것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레미족은 사절을 보내 카이사르에게 구원을 요청하였고 이를 들은 카이사르는 3개 군단을 차출하는 한편 라비에누스에게 2개 군단을 이끌고 오라고 지시한다. 그 뒤 라비에누스와 합류한 카이사르는 벨로바키족의 영토로 진입하였습니다.
이때 벨로바키족은 5개 부족과 동맹을 맺은 뒤 영토를 비우고 전원이 한 곳에 집결하였습니다. 이들은 늪으로 둘러싸인 언덕 위에 진을 친 뒤 카이사르군의 병력이 적으면 싸우고 많으면 그 자리에서 지키면서 버틸 계획이었습니다.
이 계획을 포로에게서 들은 카이사르는 이를 이용하기 위해 적은 군단을 가진 것으로 위장하기로 하였습니다. 그에겐 5개 군단이 휘하에 있었는데 그는 3개 군단밖에 없는 것처럼 위장하여 대열을 짠 뒤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렇게 카이사르가 병력을 적은 것으로 위장했으나 갈리아인들은 로마군을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카이사르는 전투를 원하였으나 적이 낚이지 않으므로 그 자리에 진을 친 뒤 흉벽과 참호를 파 방어를 갖춥니다. 그 뒤 둘은 계속 소규모의 교전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카이사르는 전투를 원하였으므로 그들이 자신감을 갖게 하기 위해 일부러 갈리아 보조병을 내보내 패배케 하여 그들의 사기를 높여주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갈리아인들은 총공세를 하지 않은 채 그들이 유리한 고지를 지킬 뿐이었습니다.
카이사르는 이것에 대해 전략을 바꿔 병력을 늘려 이들을 정면으로 공격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는 따라서 숙영 중인 군단병 3개 군단에게 자신과 합류하라고 명령합니다. 즉 기존의 5개 군단과 합쳐 총 8개 군단으로 총공격을 감행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명령을 전한 뒤 소규모 교전을 되풀이하였습니다. 이 와중에 갈리아인들은 카이사르 쪽에 붙은 레미족의 족장을 전사시키는 등의 전과를 거두기도 하였습니다.
마침내 카이사르가 추가로 요청한 3개 군단이 근처에 이르자 갈리아인들은 로마군에게 포위당한 뒤 군량이 떨어지는 것을 우려하여 우선 비전투원 대부분을 진영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카이사르는 이들을 추격하기 위해 병력을 재배치하였는데 갈리아인들의 대열 근처에 있는 약간 높은 지역에 병사를 내보낸 뒤 진영을 구축한 것이었습니다. 벨로바키족은 자신들의 비전투원이 공격받을 위험에 노출되자 그들의 진영을 이동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짚과 잡목을 쌓아 둔 뒤 불을 질러 로마군의 시야를 완전히 차단한 뒤 병력을 이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카이사르는 추격을 하고자 하였으나 그들이 시야를 가려놓은 아이디어가 적중해 추격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10마일 떨어진 곳에 진영을 새로 구축한 뒤 복병을 배치해 로마군이 식량을 조달할 때마다 급습한다. 카이사르는 이것을 며칠간 견디다 마침내 그들의 복병의 위치를 파악하고 일부러 그 지역에 기병과 경무장 보병, 그 뒤 군단병을 보내 자신이 직접 지휘하였습니다.
로마군이 매복 지점에 이르자 벨로바키족의 족장이 직접 이끄는 정예군이 로마군을 급습하였습니다. 기병이 이들과 싸우다 어느 시간이 지나자 일제히 퇴각하고 기병의 뒤를 따르던 경무장 보병이 갈리아군을 맞이하였습니다. 양군은 기나긴 전투를 벌였고 점점 로마 경보병이 우세하게 되었는데 마침내 최고 정예인 로마 군단병이 근처에 이르자 전의를 상실한 벨로바키족은 일제히 도망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로마군은 이들을 맹추격하여 다수를 죽이고 벨로바키족의 족장까지 전사시키는 전과를 거둡니다.
벨로바키 족장의 이름은 코레우스라는 자로 반로마 연합을 주도하던 자였는데 그가 죽자 구심점을 잃은 갈리아족은 사절을 보내 카이사르에게 항복합니다. 카이사르는 이들에게 볼모만 받는 조건으로 항복을 받아들입니다.
[갈리아 전쟁 8년째 : 갈리아 전역에서의 싸움]
최후의 대규모 저항이나 다름없었던 벨로바키족과 연합 부족을 격파한 카이사르는 병력을 쪼개 각지에 파견합니다. 이들 중 군대가 집중된 곳은 갈리아 남부에 살고 있는 안데스족으로 이들은 로마와 동맹을 맺은 픽토네스족을 공격하였습니다. 파비우스는 카이사르에게 받은 4개 군단으로 이들과 대치한다. 갈리아인들은 로마군의 전력이 강력한 것을 보고 퇴각을 시도하나 이 첩보를 받은 파비우스가 기병과 보병을 모두 내보내 추격을 하였다. 첫날엔 기병이 큰 전과를 거두었고 다음날 밤엔 기병이 보병의 지원 없이 깊숙이 적을 추격했다 기병을 섬멸하고자 한 갈리아인들의 대규모 공격을 받아 위태로워졌지만 군단병이 적시에 도착하여 이들을 격파합니다.
한편 갈리아 남부 해안가에 있던 로마 속주에 갈리아족의 일부가 침공을 개시하자 2개 군단을 이끌고 있었던 카나니우스가 이들을 추격하였습니다.
카나니우스가 접근한 것을 안 카두르키족은 절벽 꼭대기에 위치한 도시에서 농성하기로 결정하였다. 로마군이 포위를 시작하자 카두르키족 측에서는 알레시아 때처럼 포위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도시 밖에다 진을 친 뒤 그곳에서 군량을 반입하고자 하였습니다. 군단장 카나니우스는 첩보를 통해 그들의 움직임을 파악한 뒤 군량 수송대를 급습해 격파한 뒤 곧바로 군대를 모두 내보내 적의 진지를 공격하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대승한 로마군은 즉시 도시 전체 포위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카이사르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15개 대대(1.5군단)를 이끌고 벨가이인의 지역에 남겨둔 뒤 자신은 베르킨게토릭스의 반란의 도화선이 되었던 부족인 카르누테스족을 방문하여 부족장이었던 구투아테르를 체포한 뒤 부하 병사들에게 넘겼습니다. 병사들은 그를 고문한 뒤 처형합니다.
그 뒤 카이사르는 카니니우스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카니니우스가 포위를 해둔 도시의 경우 비교적 작은 규모의 군사행동이었으므로 카이사르가 직접 지휘하기 위해 방문하자 모든 이들이 놀랐습니다. 카이사르는 도시 내로 흐르는 수원을 끊음으로써 그들이 물의 공급을 받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카이사르가 강을 모두 차단하자 갈리아인들은 이것을 방해하기 위해 성밖으로 나와 전투를 벌였습니다. 하지만 로마군은 이들을 간단히 무찌른 뒤 수원을 차단하는 데 성공하자 갈리아인들은 어쩔 수 없이 항복합니다. 카이사르는 이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항복한 갈리아 남자들의 양손을 자르는 엄벌을 내립니다.
[갈리아 전쟁 8년째 : 갈리아 평정]
그 뒤 라비에누스가 트레베리족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앞서 벨로바키족의 반란의 주모자 중 하나였던 콤미우스가 기병 전에서 패배하여 항복하자 갈리아 전역은 완전히 평정되었습니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병력을 갈리아 전역에 골고루 배치하였고 그 군대와 함께 겨울을 나기로 하였습니다. 카이사르의 총독 임기는 다음 해 봄 3월에 완료가 되기 때문에 이 겨울이 갈리아에서 보내는 카이사르의 마지막 겨울이 될 것이었습니다. 카이사르는 겨울 동안 벨가이인의 땅에 머물면서 갈리아 수장들을 초대해 그들을 위로하며 충성을 확인하는 등 로마의 입지를 다지는 데 주력하였습니다.
[갈리아 전쟁 8년째 : 원로원과의 긴장 고조]
겨울이 끝난 뒤 카이사르는 자신의 휘하에서 군사 경험을 쌓은 바 있었던 안토니우스를 호민관에 입후보시켜 당선시켰습니다. 그 뒤 임기 후 집정관 출마를 생각한 카이사르는 선거운동을 하기 위해 루비콘 이북의 이탈리아 도시를 방문합니다.
카이사르가 이탈리아에 도착한 것은 갈리아 총독 부임한 뒤 처음 있는 일로 로마인들은 갈리아 제패라는 놀라운 업적을 이룩한 카이사르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환영하였습니다. 그가 가는 모든 도로와 문은 아름답게 장식하였고 그가 가는 곳곳마다 로마 시민은 아이들과 함께 그를 환영하였습니다. 그가 도착한 도시마다 제물을 바치며 신에게 감사하는 의식을 거행하였고 그의 거처마다 호화로운 잔치를 벌였습니다.
카이사르는 이렇게 순회를 한 뒤 자신의 군대를 갈리아의 트리베리족 영토에 집결시킨 뒤 그곳으로 돌아가 전군을 사열하였습니다. 그 뒤 자신의 부관 라비에누스를 이탈리아에 파견하여 계속 선거운동을 하게 하였습니다. 이때 폼페이우스 측에서 라비에누스에게 접근하였고 라비에누스는 뜻밖에도 폼페이우스에게로 넘어갑니다. 라비에누스가 폼페이우스의 클리엔테스였으므로 넘어간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파트로누스-클리엔테스 관계는 정치적 이익을 공유하는 관계였으므로 라비에누스가 절대적으로 따라야 했던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가령 마리우스의 경우 자신의 파트로누스였던 메텔루스를 맹비난하면서 집정관에 당선된 바 있었습니다. 라비에누스가 폼페이우스에게 넘어간 것은 이러한 관계에 얽매였기보단 그의 정치적인 입장이 원로원파와 같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가령 그의 나이는 당시 50대 중반으로 체제 고수라는 원로원파의 입장을 지지하기에 적합한 나이었습니다.
카이사르는 호민관 중 당시 로마에서 유망한 젊은 정치가로 손꼽혔던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의 빚을 모두 탕감해주어 그를 매수하고 원로원에게 맞서게 하였습니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총독 신분과 군사력을 유지한 상태에서 집정관에 출마하길 원했고 이를 쿠리오를 통해 원로원에 관철하고자 하였습니다.
원로원은 카이사르가 베르킨게토릭스를 격파한 겨울, 집정관이었던 폼페이우스와 협력하여 새로운 법안을 제출한 바 있었습니다.
1. 총독이 루비콘 강을 군대와 넘을 경우 반역으로 규정한다.
2. 부재중 입후보는 금지되며 공직에 출마할 경우 반드시 로마 시내로 들어와 후보 등록을 해야 한다.
위의 법안은 집정관 출마를 노린 카이사르를 노린 것이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카이사르는 집정관에 출마하기 위해선 총독직을 내려놓아야 했다. 그 이유는 총독은 로마 시내로 들어올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2. 민간인의 신분으로 집정관 출마를 한 뒤 집정관 투표까지 기간이 있는데 그동안 카이사르는 원로원 측으로부터 고발당할 경우 정치생명이 끝나게 될 것이 분명하였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에서 군단을 마음대로 편성하고 속주에서 군단을 모집하고 총독의 관할 밖의 지역인 게르마니아, 브리타니아 지역을 원로원의 허락 없이 공격하는 등 월권 행동을 한 바 있었다.
3. 카이사르는 군대 없이 루비콘 강을 건너는 순간 군단 지휘권을 내려놓게 되는데 이탈리아 내에 원로원이 파르티아 원정 명목으로 편성해 놓은 군대가 사실상 폼페이우스 지휘 하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 군단에 대해 카이사르는 염려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카이사르는 원로원에게 부재중 출마를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이것을 원로원이 강경하게 거부하자 호민관을 통해 민회에 법안을 가결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원로원은 폼페이우스가 동원한 옛 퇴역병들을 민회에 출석시켜 훼방 놓는 한편 크라수스의 복수를 명목으로 파르티아 원정을 하겠다고 공표한 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에게 군단병을 1개 군단씩 차출하겠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이때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에게 빌린 군단을 내놓겠다고 답하였고 카이사르는 2개 군단을 울며 겨자 먹기로 원로원에게 내놓습니다. 이 2개 군단은 집정관에게 인도된 뒤 로마 근교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카이사르는 충성스러운 13군단과 함께 남하한 뒤 원로원 측에게 최종적으로 서신을 보냅니다. 이 서신에서 카이사르는 자신이 갈리아 제패로 로마에 엄청난 영광을 안겨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부당함을 언급한 뒤, 원로원이 원한다면 자신이 군대를 해산하겠노라고 선포하였습니다. 단 이렇게 되려면 폼페이우스의 군단도 같이 해산해야 하며, 둘이 군대를 해산함으로써 로마는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뒤 원로원에게 군대 없는 총독의 신분으로 입후보하여, 자신의 신분의 안전함이 보장된 상태에서 집정관에 출마한다면 이는 모두에게 바람직한 결과가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카이사르에게 있어 파멸을 피할 수 있는 상태에서의 최대한의 양보였습니다. 그러나 원로원은 이를 거부하였고 결국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넘어가면서 로마는 내전으로 치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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