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페르시아 전쟁, 그 시작과 끝은?
BC 491년부터 BC 449년까지 페르시아와, 아테네 및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뭉친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벌인 전쟁. 아테네의 급성장을 일궈낸 전쟁이자 고대 그리스의 황금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받는 전쟁입니다.
대략 BC 490년부터 BC 479년까지는 페르시아의 공격과 그리스 연합의 방어가 이루어졌고 BC 479년부터 BC 449년까지 그리스의 공격과 페르시아의 수비가 이루어졌습니다.
어쨌든 이 전쟁 이후에도 페르시아는 건재했으나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의 왕중왕에 맞서 자신들의 자유와 독립을 지켜내었다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헤로도토스가 그리스 최초의 역사서를 저술하기도 했습니다.
[발단] 이오니아 반란 (BC499~BC493)
페르시아 전쟁이 벌어지게 된 계기는 이오니아(소아시아 서부 일대의 그리스 식민지 도시국가들) 반란에 아테네가 개입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오니아 지역은 키루스 2세 치세 때 페르시아의 영역에 속하게 되었는데, 이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이오니아 도시국가들 중 철학자 탈레스의 고향인 밀레투스 등이 중심이 되어 몇 가지 요인에 의해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이때 이들은 그리스 본토의 국가들에게도 만약 자신들의 반란이 실패한다면 페르시아가 이번엔 그리스 본토를 공격할 것이라며 지원을 요청했는데, 스파르타를 비롯한 다른 도시들은 페르시아의 어마어마한 규모에 기가 질려 다 가만히 있는데 아테네와 에레트리아가 지원을 하면서 전쟁의 빌미를 제공합니다. 아테네가 이때 개입한 것은 밀레투스 등이 자신들과 혈통적 연계가 있는 이오니아족이었기 때문이었던 것도 있고 막 민주정으로 전환한 상태에서 쫓겨난 참주였던 히피아스를 페르시아가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전쟁에서 땡잡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시민들의 욕심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테네의 지원은 전함 20척 정도의 작은 것이었고 이들은 사르디스를 공격해 키벨레 사원을 불태우기도 하지만 페르시아 기병대에 패하고 곧바로 도주합니다. 이후 이오니아 반란군은 키프로스와 헬레스폰토스 일대에도 손을 뻗어 보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라테 섬 해전에서 이미 주요 섬 국가들을 매수한 페르시아에게 간단히 깨지며 진압됩니다.
참주 히피아스의 망명 건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전쟁 직전 아테네는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이 과정에서 당시 그리스의 자타공인 최강이던 스파르타와 마찰을 빚었습니다. 이에 불안을 느낀 시민들은 페르시아와 우호관계를 수립하려고 사절단을 보내지만 이들은 페르시아의 요구에 따라 단순한 동맹이 아닌 전면 복종을 해버리고, 이를 내심 기분 나빠한 본국 시민들은 이 일을 흑역사 취급하고 없는 일처럼 넘어가버리기로 합니다. 따라서 자신들이 페르시아를 공격해도 도의적 책임이 없단 아테네와 복종을 맹세한 아테네가 배신을 했다고 여기는 페르시아 사이에 이견이 생겨 이후의 전쟁을 발발시켰습니다.
이후 페르시아는 이오니아 일대의 지배권을 안정화시키며 다리우스 대왕의 사위 중 하나인 마르도니오스의 지휘 하에 BC 492년에 아테네에 대한 응징군을 보내지만 아토스 곶에서 폭풍우로 삼분의 일 이상의 함대를 상실하고 마르도니오스 자신도 마케도니아 왕국을 굴복시키는 과정에서 이민족들에게 부상을 입어 아테네로 응징군을 보내는 건 나중으로 미뤄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동원된 병력은 호왈 20만이라고 합니다.
[페르시아의 1차 그리스 원정]
BC 491년 페르시아는 그리스 본토의 도시국가들에게 사절을 보내 복종에 대한 상징적 의미로 흙과 물을 보내라고 요구하는데, 여기에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사신들을 처형해 버리는 것으로 응수합니다. 이에 분노한 다리우스 대왕은 이전에 이오니아 반란 때 반란군을 지원하기도 했던 에레트리아와 아테네를 1차적으로 제압하기 위해 원정군을 보냅니다.
지상군 2만 5천과 600척의 함대로 구성된 이 원정군은 에레트리아를 공격, 제압하고 아테네 공략을 위해 마라톤 평원에 상륙합니다. 이에 아테네는 스파르타를 포함한 여러 도시국가들에 지원군을 요청함과 동시에 9천의 중장보병으로 구성된 군대를 밀티아데스에게 위임해 마라톤으로 파견, 페르시아군과 대치했으며 이후 펼쳐진 마라톤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을 격파하고, 기병을 포함한 주력을 함대에 탑승시켜 아테네 시 근방으로 접근하려던 페르시아 함대가 도착하기 이전에 신속히 아테네로 돌아와 상륙을 저지합니다. 결국 아테네 공략에 실패한 페르시아 군은 철수했습니다.
이때 마라톤 전투의 소식을 먼저 전하기 위해 전령이 달려온 것이 마라톤의 기원이 되었다는 일화가 있는데, 실제로는 전령이 먼저 달려온 게 아니라 아테네군 전체가 함대가 오기 전에 아테네로 황급히 달려왔다고 합니다.
[페르시아의 2차 그리스 원정(BC480)]
다리우스 대왕은 아테네 정벌의 실패 소식을 듣고 복수를 맹세하며 2차 원정군을 보낼 준비를 하나 이집트에서 반란이 일어나 이를 진압하다가 병사하고, 크세르크세스 1세가 그 뒤를 잇습니다. 크세르크세스는 이집트 반란을 진압하고 바빌로니아에서 일어난 반란도 진압한 다음 대규모 원정군을 직접 이끌고 그리스 원정길에 나섭니다.
헤로도토스는 이 원정군을 아시아 일대에서 소집한 180만, 유럽 일대에서 추가적으로 합류한 30만, 하인과 수행원 및 여타 잡역부들이 260만으로 육군만 470만이며 해군은 갤리선 1207척과 수송선 및 보급선 3000여 척에 해군 인력은 25만이어서 총 규모 500만이라는 초월적인 수치를 제시하고 있지만, 현대의 연구에서는 대략 20~50만 사이로 추정됩니다. 헤로도토스는 이외에 헬레스폰토스(다르다넬스 해협) 일대에 부교를 건설해 육군을 옮겼다고 하며, 아칸토스 일대에 운하를 파서 함대를 안전하게 옮기기도 했다는 일화를 들기도 합니다.
이에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헬라스 동맹' 을 결성해 대항 하기로 정하고 동맹에 참여하지 않은 다른 국가들에게도 지원을 요청하지만 시칠리아의 시라쿠사나 아드리아해의 코르키라(오늘날의 코르푸)와 같은 힘 있는 다른 도시국가들은 눈치만 보면서 합류하지 않습니다.
그리스 연합은 1차 방어선을 테르모필레와 아르테미시움 일대에 구축하고 테르모필레에는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이 이끄는 중장보병 6천여 명(스파르타는 이때 또 다른 종교 축전 중이어서 근위대 300명 만을 보냈고, 펠로폰네소스의 다른 도시국가들과 보이오티아의 테베, 포카스 등이 추가적인 병력을 보탰습니다.)과 여기에 딸린 시종 및 노예들을 포함해 1만여 명 정도 되는 병력을 이끌고 방어선을 첬고, 아르테미시움에는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끄는 갤리선 271척과 기타 함선 50여 척(나중에 겔리선 53척 추가)을 이끌고 방어선을 칩니다. 이것이 유명한 영화 300의 배경이 됩니다.
여기에 페르시아 군이 접근해 3일 동안 테르모필레 전투와 아르테미시움 해전이 펼처지는데, 3일 만에 테르모필레가 뚫리면서 아르테미시움의 그리스 해군도 방어를 포기하고 철수합니다.
이후 페르시아군은 아테네를 점령하고 시가지를 방화한 뒤, 펠로폰네소스 일대까지 공격하려 하나 테미스토클레스에게 속아 넘어가 지형적으로 대단히 불리한 살라미스 해협으로 들어가(함대가 너무 대규모다 보니 좁은 해협에서는 그리스 함대보다 불리합니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대패하고 테실리아로 돌아가서, 겨울이 다가오자 마르도니오스에게 상당수 병력을 떼어주고 크세르크세스 자신은 철수합니다.
[페르시아의 3차 그리스 원정]
크세르크세스에게서 그리스 원정에 대한 권한을 이어받은 마르도니오스는 겨울이 지난 다음에 재차 그리스 원정을 기도합니다. 1차로 아테네를 헬리온 동맹에서 떼어내고자 시도하지만 실패하자, 재차 남하해 아테네를 또 불태웁니다. 이에 살라미스로 피신한 아테네는 스파르타에게 계속 지원을 요청했고, 이에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동맹국들의 힘을 합처 중장보병만 3만여에 달하는 원정군을 파견합니다. 여기에 아테네 중장보병 8000과 합류한 뒤 플라타이아이로 진격해 페르시아 군과플라타이아 전투를 벌여 페르시아 군을 격파, 동시에 그리스 해군은 이오니아 지역의 미칼레 전투에서 요새를 쌓고 버티는 페르시아 해군을 격파해 페르시아군을 그리스 본토에서 밀어내게 됩니다.
[이후 전쟁과 페르시아의 반응(BC478~449)]
페르시아의 침공이 끝난 뒤에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 연합군은 페르시아를 몰아낸 여세를 타고 세력 확장을 꾀했으며, 이오니아 일대를 포함한 에게해 전체를 넘어서 헬레스폰토스와 흑해, 키프로스와 이집트까지 세력확대를 꾀했습니다.
또한 이러한 활동에 스파르타가 소극적으로 움직인 반면 아테네는 적극적으로 세력 확대를 꾀해 BC 478~BC 477년 사이에 델로스 동맹을 결성하고 페르시아에 대한 적극적인 공격을 주도하게 되었고 에게 해 북부의 마지막 페르시아 기지였던 에이온을 BC 476년에 함락시켰고, BC 466년에는 대규모 델로스 동맹군을 소아시아 지역으로 파견해 이오니아 지역을 모두 점령합니다. 이집트는 BC 459년과 BC 454년에 아테네의 지원으로 반란을 일으키나 페르시아에 진압당했고, 키프로스 역시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치열한 쟁탈전이 펼쳐졌다. 결국 지친 양국은 BC 449년에 칼리아스 화약을 맺어 전쟁을 끝냅니다.
단순히 이렇게만 보면 꽤나 열심히 치고받은 느낌이 들지도 모르지만, 페르시아는 고질적인 왕위 다툼에 신경 쓰느라 방어 위주의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고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을 아테네 제국으로 바꾸느라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지속한 감이 있습니다. 실제로 아테네는 이 전쟁을 통해 깡패로 성장했습니다.
일단은 페르시아라는 거대한 성의 왼쪽에 조금 큰 균열을 만들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스인들은 이 전쟁의 패배로 페르시아가 사분오열 됐으면 좋겠다고 상상했습니다. 아테네의 비극 작가 아이스킬로스가 쓴 《페르시아인들》에서 그 사실을 엿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전쟁으로 페르시아 일대에 미친 영향을 무시할 수도 없는 것이, 에게해-이오니아 일대만 영향을 끼쳤다면 모를까, 상당히 중요한 속주인 이집트 및 시리아 근방까지도 영향이 갔고, 덕분에 이집트는 페르시아 속주 중 가장 반항적인 속주로 존재하게 됩니다. 트라키아 일대의 속주는 유지가 어려운 시점까지 가기도 했고 이오니아에서 세금 거두라면서 지속적으로 갈굼 받은 지역 총독들 입장에선 상당히 큰 문제기도 했습니다. 그리스인들이 용병으로 페르시아 왕위 다툼에 개입하기도 했습니다.
[아테네와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몰락(BC431~338)]
자만이 뻗친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을 구성해 동맹의 국가들에게 횡포를 부리며 스파르타에 오만을 부렸습니다. 결국 이를 보다 못 한 전투 종족 스파르타는 성질이 뻗쳐서 아테네와 대립하던 남그리스 도시국가를 중심으로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결성,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BC 404)이 발발했습니다. 아테네는 페리클레스의 지도하에 육지에서의 싸움을 피하고 해군으로 응수하는 전략으로 성과를 거두었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전쟁의 장기화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 도시민의 1/3이 죽었다는 무시무시한 전염병이 터지고 페리클레스도 이것에 걸려 죽자 아테네는 국력이 눈에 띄게 약해집니다. 그리고 페리클레스의 퇴장으로 정치의 공백이 생겼고 이 틈을 탄 알키비아데스와 같은 신흥 정치가가 등장하여 그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시라쿠사 전쟁을 제안합니다. 시민들은 이것을 지지했지만 알키비아데스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다른 정치세력의 공작으로 알키비아데스는 성상파괴의 누명을 뒤집어쓴 채 망명하고 그 결과 그 없이 시라쿠사 전쟁을 수행하게 됩니다. 전염병으로 인해 국력이 크게 쇠약해진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놔두고 시칠리아 섬까지 가서 그 섬의 가장 크고 강력한 도시인 시라쿠사를 포위 공격하고자 한 것이라 뜬금없어 보이나 당시 아테네 인들의 생각은 이 도시를 점령해 그 자원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하는 데 보태자 이런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을 가장 적극적으로 주장한 알키비아데스가 추방당한 뒤 이것을 앞장서서 반대한 니키아스가 이 전쟁을 맡게 되자 지휘는 엉망으로 되었습니다. 게다가 스파르타와 코린토스의 지원 병력이 상륙에 성공하여 지원병을 모집하고 아테네군의 포위를 저지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시라쿠사 역시 매우 강력한 대도시였으므로 공략은 쉽지 않았으며 아테네는 그야말로 물량을 모두 투입하여 어떻게든 승리코자 했으나 마침내 대패하여 이 병력과 물량이 시칠리아 섬에서 소멸됨으로써 아테네는 100여 척의 함대를 제외하고 모든 전쟁 물자를 손실한 끔찍한 타격을 입습니다.
그 뒤 알키비아데스를 불러들여 100여 척의 함대로 계속 버티다 재정확보를 위해 알키비아데스가 일등항해사에게 관리를 맡기고 자리를 뜬 상태에서 일등항해사가 멋대로 스파르타 해군에게 덤벼 가벼운 패배를 당하자 격분한 시민들에 의해 그는 사령관 지위에서 쫓겨납니다. 그 뒤로 아테네는 남은 국고와 인력을 쥐어짜 내어 새로이 편성한 함대로 아르기누사이 해전에서 스파르타 해군을 격파하지만 전투 직후 풍랑을 만나 생존자 구출과 시신 수습을 포기하고 철수하였고 시민들은 대단히 분노하여 지휘관들을 모두 처형해버립니다. 그 뒤 경험 있는 지휘관이 부족한 아테네 해군은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에서 스파르타 해군에게 가볍게 격퇴되고 결국 스파르타의 승리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마무리됩니다.
그 뒤 아테네를 점령한 스파르타는 스파르타대로 국력을 이 전쟁에 너무 소모해서 전후 아테네의 위임통치조차 힘에 부칠 지경이 되었고 전후처리에 불만을 품은 코린토스와 테베가 반기를 들어 재차 코린토스 전쟁, 스파르타-테베 전쟁을 치르며 그리스의 패권을 차지했습니다. (그 사이에 아테네는 2차 델로스 동맹을 건설해 어느 정도 국력을 회복했습니다.) 스파르타는 이때 테베에게 당한 패배로 인해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우선 총 전투 인원이 2만 명이 조금 안 되는 스파르타 군이 이 한 싸움의 패배로 상당수가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며 스파르타의 피 정복민인 헬롯인들이 승자인 테베에 의해 해방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새로운 주권국이 된 테베는 페르시아 전쟁의 피날레를 장식한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동족 그리스인들을 배신하고 페르시아 편에서 싸우다 아테네군에게 대패하였었습니다.
그러나 테베의 영광도 잠시, 장창병과 기병으로 무장한 마케도니아가 북쪽에서 밀고 내려오면서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차례로 마케도니아에 접수당했고 이를 보다 못한 두 원수지간인 아테네와 테베는 동맹을 맺고 마케도니아와 대결합니다. 테베와 아테네는 당시 그리스에서 가장 부유하고 인구가 많은 도시 국가들이었으므로 이들의 연합은 그만큼 마케도니아의 침략이 위협적이었다는 말이었습니다. 이때 마케도니아의 왕인 필립포스와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훗날의 알렉산드로스 대왕)는 이 연합군을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격파하여 (이때 알렉산드로스는 기병을 지휘) 이 두 강력한 도시들의 그리스에서의 패권다툼을 종식시키고 마케도니아는 그리스의 새로운 패자가 됩니다.
그 이후 한때 종주국이었던 테베는 필립포스가 죽고 알렉산드로스가 즉위한 직후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알렉산드로스에게 역으로 진압당하여 도시가 완전히 파괴되고 시민 전원이 노예로 팔림으로써 소멸당해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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